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14. 임신과 낙태에 대한 영화적 시선

상처를 만드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인간'
윤리적 잣대 앞 약자…죄책감은 모두의 몫

아픈 역사의 이름 '위안부'

얼마 전 한국인 위안부 모습이 담긴 영상이 최초로 공개돼 화제가 되었다.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를 촬영한 18초짜리 흑백 영상 속 여성들은 초조와 불안의 눈빛이 역력했다. 이들 여성들이 위안부임을 증명하는 것은 고(故) 박영심 할머니(2006년 작고)가 자신이라고 밝혔던 사진이다.

고(故) 박영심 할머니는 태평양전쟁 중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서 만삭의 모습으로 찍혔다.

지난 2000년 일본인 자유기고가 니시노 루미코씨가 북한에 생존해 있는 박영심 할머니를 만났다. 당시 증언은 충격적이다. "성행위를 거부하다 일본 병사가 휘두른 단도에 목을 베여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있다. 사진 속 임신한 여자가 나인데, 아기는 포로수용소에서 유산됐다"

당시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에게 606호라는 이름의 주사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맞혔다. 임신을 막기 위한 방도였다. 하지만 주사약이 들지 않아 임신이 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그때는 강제 낙태를 시키거나 자궁을 적출하기도 하고, 심하면 총살시키기도 하였다.

위안부로 끌려간 20만 여명의 여성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왔다는 공포,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과 더불어 현실적으로는 임신이 되면 어떡하나하는 두려움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올해 상반기 개봉한 영화 중에 가장 인상적인 영화 한 편을 고르라면 안느 퐁텐 감독의 영화 '아뉴스 데이'(2016)일 것이다. 안느 퐁텐 감독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으로 '드라이 클리닝'(1997)으로 베니스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대중에게 알려진 영화로는 '코코샤넬'(2009)과 '투 마더스'(2013) 등이 있다. 2016년 '아뉴스 데이'로 바야돌리드영화제 작품상 수상에 이어, 프랑스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세자르영화제와 시애틀영화제 감독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는 영예를 안았다. 

폭력이 남긴 상처 그리고 회복

'아뉴스 데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수녀들의 임신이라는 충격적 주제를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1945년 12월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다. 프랑스 여의사 마틸드(루 드 라주 분)는 전장에서 자국의 군인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수녀가 병원 안으로 다급하게 들어선다.  수녀를 따라 수녀원을 방문한 마틸드는 충격적인 사실을 목도한다. 군인들의 집단강간으로 수녀 일곱 명이 동시에 임신을 한 것이다. 임신한 수녀들은 임신 사실이 당국에 밝혀질 것이 두려워 프랑스 출신의 적십자 소속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마틸드는 비밀리에 수녀원을 오가며 수녀들의 출산을 돕는다. 또한 양심의 가책으로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수녀들을 위로한다. 강간에 의한 임신을 개인의 치욕으로 느끼고 있던 수녀들에게 마틸드는 강간은 폭력이며, 이로 인해 피해를 당한 것은 자신들이라는 자각을 분명히 일깨워준다. 그럼으로써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되고 출산한 아이들은 수녀들이 거두어 공동육아를 하기로 한다. 수녀원 공동체가 되살아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인간이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도 결국은 인간임을 '아뉴스 데이'가 말해준다. '아뉴스 데이(Agnus Dei)'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이다.

영화의 실제 인물인 마들렌 폴리악(영화에서는 마틸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영화 '아뉴스 데이'가 강간으로 인한 임신과 출산,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면  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의 영화 '24주'는 임신과 낙태문제를 다루고 있다.

찬반론이 팽팽한 가운데 영화 '24주'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그 상황에 부닥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24주'를 연출한 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은 독일 영화계의 신예다. 2013년 첫 장편인 '투 머더즈'가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의 후보에 오르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투 머더즈'에서 감독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을 다뤘다. 

한없이 외로운 이름 '여성'

'24주'는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아스트리드(줄리아 옌체 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둔 그녀는 담당의사로부터 태아가 다운증후군을 가졌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듣는다. 부부는 심각하게 고민한다. 아이를 낳을 것인지, 낙태할 것인지. '24주'는 그 선택의 기로를 형상화한 숫자다.

아스트리드는 남편에게 묻는다. "그 애는 자기 방을 치울 수 있을까?" "밥은 혼자서 먹을까?" "샤워는?" "기저귀를 차야 하나?"

직접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보고 온 아스트리드는 아기를 낳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그들의 눈빛, 목소리, 호기심, 붙임성 등이 어떤 가능성 혹은 생명성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쑥 원하는 아기 이름을 내뱉기도 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감에 젖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의 불안, 슬픔을 감출 수 없다.

그녀의 직업은 하필이면 코미디언이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내려온 후 그녀는 무대 뒤에서 깊은 한숨을 삼킨다.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지쳐 보이고 눈 밑의 기미가 유독 짙다. 

결국 아스트리드는 낙태를 결심하고 혼자서 병원 침대에 올라간다. 약을 넣고 수술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그녀의 선택에 동조할 수도, 책임질 수도 없다. 오로지 아스트리드 몫이다. 여자가 한없이 외로워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마냥 자상한 것 같던 남편도 그녀의 선택에 못마땅함을 드러낸다. 그녀의 결심이 마치 아이 키우는 게 싫어서 선택한 것처럼 차갑게 대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여자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며 낙태를 잘 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따지는 게 아니라 기로에 선 여성이 느끼는 감정, 고뇌에 주목한다.

이러든 저러든 여자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수술대 위에서,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여자는 수치심을 견뎌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도,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아도 죄책감은 필연적이다. 

"담배 한 대 핀 것 밖에 없어요" 아스트리드가 할 수 있는 변명은 겨우 이 정도이다. 그래서 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은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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