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18. 여성들의 우정을 그린 영화

묶였다 풀어지고 울다가 웃으면서 감정 공유
사회적 편견 앞에 진실하고 섬세함으로 연결

돌봄노동이 만든 편견

여성에게도 우정이 있는가? 물음 자체가 불온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가끔 듣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큰 소리로 "당연하죠. 어쩌면 남성들의 그것보다 차원이 다를걸요?"하고 대답하곤 한다. 고대로부터 여성은 우정을 지키기에 부적합한 존재로 치부되어 왔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남성보다 뒤떨어진다는 논리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시간과 물질, 정신을 투자해가면서 우정을 지키기에는 부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 즉 사회구조의 문제였다. 일과 양육, 가족 돌봄 노동에 시달리다보면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않기 때문에 수다를 넘어서는 건강하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편견일 수 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여성들의 우정에 대한 첫 기록은 12세기 독일의 수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년 ? 1179)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축복받은 힐데가르트' 또는 '성 힐데가르트'로 알려져 있다. 그녀에게 '최초의 여성'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무수히 많다. 수녀, 예술가, 작가, 상담가, 멘토,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운동가, 예언자, 작곡가… 등. 그녀는 신학, 식물학, 의학 서적을 썼으며, 편지, 서정시, 음악,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도덕극을 썼다. 또한 그녀의 첫 작곡은 오페라의 기원이 되고 있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위대한 것은 다재다능한 여성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여성의 우정을 몸소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수녀들의 멘토로서, 어머니 같은 존재로서, 수많은 수녀들을 이끌어주고 또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녀가 수녀들과 주고받았던 편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우정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글자를 쓸 수있다는 것은 우정의 질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더욱 돈독하게 해주었다.

풋풋한, 그러나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우정은 다양한 양태로 보여준다. 어린 여학생들의 '로맨틱한 우정', 법과 제도에 맞선 투쟁공동체로서의 연대, 근대 유럽의 문학살롱이나 조선의 규방문화 혹은 빨래터, 최근에 더욱 많아지고 있는 문화모임, 독서모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우정이 있다. 여기서 여성들은 서로의 생각을 감정을 나누고 삶을 모색하거나 투쟁을 계획하기도 한다. 물론 가끔 수다가 주를 이루기도 하나 어떤 형태로든 서로의 일체감 혹은 친밀감을 더욱 돈독히 하는데 많은 열정을 쏟는 게 사실이다. 경쟁을 넘어 연대를 꿈꾸는 것이다. 그들만의 연대, 사랑, 꿈, 미래를 보여주는 영화는 무수히 많다. 영화 <나우 앤 덴>(1995)도 여성들의 우정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970년 여름, 인디애나 쉘비 마을 가스등개발지역구를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에는 12살의 네 명의 소녀가 나온다. 로버타(로지 오도넬 분), 크리시(리타 윌슨 분), 티니(멜라니 그리피스 분), 사만다(데미 무어 분)가 그들이다. 그들은 한마을 앞뒷집에 사는 친구들이다. 그들은 '워머형제'라는 남학생 무리의 놀림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미스테리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등 모험을 일삼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등 심리적 연대감을 끈끈히 한다는 것이다.

로버타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고, 크리시는 엄마의 서툰 성교육으로 정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엄마가 임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원에 호수로 물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 설명했기 때문이다. 배우가 꿈인 티니는 멋내는 걸 좋아하며 벌써부터 아카데미 수상 소감을 연습하는 맹랑한 소녀이고, 사만다는 아빠가 집을 나가서 방황을 한다. 이들 네 소녀는 각기 다른 환경, 성격, 취향 등을 지녔지만 '나무 위의 집'을 목표로 우정을 돈돈히 지켜나간다.

물론 우정을 지켜나가는 데는 위기도 있었다. 미스테리 모자살인사건을 추적하다 모아둔 돈을 써버리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살인사건 기사를 찾다가 로버타는 엄마의 사망기사를 읽게 되기도 한다. 엄마의 사망원인은 교통사고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모자살인사건, 로버타 엄마의 교통사고, 밤에만 나타나는 피터아저씨… 등.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안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꿈을 꾼다. 안전한 세상에서 함께 살자고.

'나무 위의 집'은 그들의 소유가 되었지만 아니러니하게도 그날은 그들이 서로 독립하는 날이기도 했다. 각자 자기 방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미래를 꿈꾸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L 그리고 약속한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꼭 같이 있어주기로 하자"고. 영화는 그들이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끝난다. 로버타는 박사, 사만다는 작가, 티니는 유명배우, 크리시는 임신 9개월의 주부가 되어 만난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리고 외친다.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고. 그들 어린 시절의 우정은 어른이 되어 또 어떻게 펼쳐질까 궁금하다. 물론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가 그 이야기를 대변해주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강철'을 따뜻하게 하는 힘

지난달 27일, 미국 현대연극의 대표 배우이자 연출가, 극작가로 활동한 샘 셰퍼드가 별세했다.

셰퍼드는 영화 '파리, 텍사스'로 1984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으며, 영화 '철목련'에서 스퍼드 역으로 출연한 배우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 '철목련'은 중년여성들의 우정을 그린 영화이다.

소녀들의 우정은 한갓 낭만에 불과하다 치더라도 중년의 우정은 어떠한가. 중년 여성들의 우정은 영화 '철목련'이 보여준다. 철목련, 원제는 'Steel Magnolias', 제목이 은유적이다. 영화의 대사에서처럼 "철로 만들어진 남자"들과 '목련 같은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마린(샐리 필드 분), 그녀의 딸 셀비(줄리아 로버츠 분), 미용실 주인 트루비(돌리 파튼 분), 방송국 여사장 클레리(올림피아 듀카키스 분), 미용사 아넬(데릴 한나 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재위저(셜리 맥클레인 분) 등 여섯 명이다.

트루비가 운영하는 동네미용실은 이들 여섯 명의 여자들의 사교장이기도 하고, 각자의 고뇌를 털어놓고 서로 걱정해주는 심신공동체이다. 미용사 아넬은 남자에게 차여 빈털터리가 되어 이 미용실에 온 상태였고, 새떼를 쫓느라 총을 쏘아대는 남편을 둔 마린, 인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결혼해 임신까지 한 그녀의 딸 셀비, 남편과 사별해외로움을 가까스로 달래고 있는 클레리, 매일 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마린의 남편이 내는 소음에 못살겠다고 고발까지 한 재위저, 이들은 하나같이 여성으로 갖는 고뇌를 지니고 있다. 처지가 다르고 성격, 취향이 다르지만 우정과 관대함이 있어 각각 고뇌의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결국 셀비의 죽음 앞에서 진심어린 위로와 축원의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 제 몸 안에서 생명의 탄생도 경험하고 죽음도 경험하는 여성. 여성들의 연대는 생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더 깊이가 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어찌됐든 여성은 강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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