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20) 치유적 도구로서 예술

세상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과 깊은 통찰
삶의 빈곤 채워주는 예술가의 역할 중요

비행기 이륙을 앞두고 가끔 하는 생각이 있다. '만약 비행기가 추락한다면'이라는. 비행기 추락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실 내가 남긴 흔적들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나의 흔적들을 누군가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은 나를 뭐라고 할까.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글과 사진, 목소리, 생활기록부, 가족, 친구, 동료, 선생님, 어머니, 애인… 다 만나봐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이런 상상을 하다가 혼자 웃기도 하지만 다소 심각해질 때도 있다. '지금 잘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정수리를 스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인간일진대 지금 현재가 죽음의 과정 속에 있음이 서늘하게 새겨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보면서 그 생각이 깊어졌다.

비참한 빈곤과 행복을 한 컷에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2015)는 존 말루프라는 역사 저술가에 의해 발견된 네거티브 필름의 주인공, 비비안 마이어의 삶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존 말루프는 2007년, 우연히 동네 경매장에서 15만장의 네거티브필름이 담겨 있는 박스를 구입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시카고 역사책에 실을 사진을 구하고 있던 차였다. 박스를 열고 필름을 현상해보니, 엄청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의 미국과 유럽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의 표정을 클로즈업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작품을 찍은 작가는 누구이며, 왜 공개하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건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물의 신비로움이다. 펠트 모자에 헐렁한 셔츠, 특이한 억양, 사람마다 다르게 불리어진 이름 등.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제각각 다르다. 유별나고도 하고, 모순적이라고도 하고, 마음이 따뜻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없었다. 옷과 편지, 영수증, 각종 서류더미 속에서 그녀의 비밀스런 삶을 해부할만한 단서들을 찾아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단순히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어떤 삶의 과정이 있었는지에 대한 큰 그림은 그릴 수있었으나 그녀의 내면 가까이 다가갔다고는 볼 수 없다. 어쩌면 그녀를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건 그녀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사진이 아닐까. 그래서 더욱 한 평론가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사람들을 가까이 찍고 있다. 낯선 이의 공간으로 성큼 들어가서 두 존재가 맞닿아 진동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그리곤 유유히 사라진다."

비비안 마이어의 삶이 그러했다.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은둔의 삶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밀착된 삶도 아니었다. 사진에서처럼 다정히 때로는 냉정하게 바라보다 순간의 깊은 공명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사진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짐작컨대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내면의 소통방식 혹은 거리를 지나는 아무나의 세상에 대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을지도. 그녀가 찍은 사진 속의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와 그녀들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많은 사연들을 무엇으로 대변할 수 있으랴. 그 마음을 비비안 마이어는 순간에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사람과의 소통이 어려웠다고 기억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그걸 가능하게 한 건 그녀가 받은 상처였을 것이다. 가족도, 돈도, 직업도, 사랑도 없는 그녀만이 아는 것. 그것은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비참한 빈곤'과 '행복'을 한 컷에 잡아낼 수 없다.

천재,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한 여자가 어디론가 정신없이 내달린다. 그녀는 슬픔에 빠질 때마다 들로 산으로 돌아다닌다. 나무를 껴안고 새와 벌레들과도 이야기한다. 그러다보면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그녀의 이름은 세라핀이다.

영화 '세라핀'(2008)은 '롤폴링'(2011), '비올렛'(2013)의 감독 '마르탱 프로보스트의 작품이다. 그는 남성임에도 여성들의 비참한 삶과 욕망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여성주의 영화감독이다. 영화 '롤폴링'에서 로즈역을 맡았던 욜랭드 모로는 '세라핀'에서 열연함으로써 까뜨린 드뇌브와 같은 배우와는 대척점에서 확실한 개성파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14년 파리의 북동쪽의 작은 마을 상리스, 세라핀은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의 집안일을 해주고 벌어들인 약간의 돈으로 그림 재료들을 사는데 다 써버린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주변의 책망에도 굴하지 않고 세라핀은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물감을 사들일 돈이 부족해 스스로 재료를 만드는데, 들꽃이나 풀, 돼지피, 심지어는 교회에서 촛농까지 훔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날, '빌헬름 우데'라는 독일 미술평론가의 눈에 띄게 된다. 그녀마의 독특한 색감이 한 미술평론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림의 색감 독특하다는 빌핼름의 평에 세라핀은 겸연쩍어 하면서도 '수호천사의 계시'라는 중얼거림으로 응수한다.

몸집이 큰데다 뒤뚱거리며 걷고, 아둔한 듯 표정이 멍하고, 칭찬에도 거짓말이라고 의심하는세라핀, 그녀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나쁜 소리만 듣고 살아서 그래요"라고. 천재적이라는 평론가의 말에 마을사람이나 집주인은 오히려 경멸의 눈빛을 보이기만 하는데, 빌헬름은 세라핀을 적극 후원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풀리면 재미없지. 묵묵히 그림에만 몰두하던 세라핀에게 벨헬름의 관심과 호의는 낭비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게 한다. 결혼을 약속했던 한 남자는 그녀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유일하게 그녀가 의지했던 사람이 떠나버리고 난 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육의 생존을 위한 허드렛일과 영혼의 생존을 위한 그림그리기였다. 슬픔이 깊어지면 새와 나무, 벌레들과 대화하면서 사는 게 그녀의 유일한 낙. 상처받은 영혼을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주는 것은 촛농 훔치는 것까지 용서하시는 신과 그림,그리고 자연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인정, 사랑, 돈의 맛을 알게 된 세라핀은 점점 미쳐간다.

결국 한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것은 깊은 상처이다. 사랑받아야 할 때 사랑받지 못하고 독하게 혼자 버티게 하는 세상의 매정함. 그것이 한 영혼을 지치게 하고 마음의 병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의 문제라면 더욱 심각해진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늘 대상화되었다. 사랑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사랑받아야만 생존 가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위의 영화 속 주인공 비비안 마이어나 세라핀처럼 가족도, 직업도, 사랑도 받지 못하는열악한 처지의 여성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창녀 아니면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은 너무나 실존적이어서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부여잡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을 보여주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인물들을 우리는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비비안 마이어도 그렇고 세라핀도 그 중 한명이다. 세라핀의 그림 속에서 미적인 독창성을 알아봐준 것도 빌헬름의 예술가적 시선이었기에 가능했고, 비비안 마이어의 슬픈 따뜻함을 읽어주는 것도 존 말루프라는 젊은 예술가에 의해 가능했다. 예술이 치유적 도구로서 훌륭할 수 있으나 그것을 알아봐주는 이 또한 예술가인 것이다. 예술도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이즈음, 예술 그 자체로서 삶의 빈곤을 메꿔보려고 했던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허망함과 예술의 위대함을 되새겨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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