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22. 멸시와 감금 속에서도 희망을 쓰다!

뉴질랜드 대표작가 재닛 프레임 자전적 일대기 그려
본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 영혼을 탐색해 들어가야

제주의 마을마다 있는 퐁낭거리는 마을공동체의 상징이며 사랑방 역할을 하던 문화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 퐁낭거리를 지나는 것이 늘 공포였다. 소금기를 베어 문 매미소리가 요란한 여름날이면 현기증을 동반한 구토감이 밀려오기도 하였다. 그것은 강렬하게 내면에 각인된 어떤 경험과 관련성이 있다. "쟈네 아방은 밤새낭 휘엄서라."로 요약할 수 있는 마을 어른들의 뒷담화. 그것은 퐁낭거리를 지나야만 학교로 갈 수 있는 나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으며 수치를 내면화하는 반복의 일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An Angel At My Table>(1990)를 보며 그때 그 공포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남과 어울리려면 쑥스럽고 학생회관에 가려면 두려웠다."는 재닛 프레임의 고백은 '이제 더 이상 난 혼자가 아니다'라는 위로감을 느끼게 하였다. 뚱뚱하고 못생긴(?) 빨간 머리 재닛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난 꼭 시인이 되고 말겠어"

제인 캠피온의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는 뉴질랜드의 국민작가 재닛 프레임(Janet Frame, 1924~2004)에 대한 자전적 영화이다. 재닛 프레임은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 뉴질랜드가 내로라하는 작가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렸을 때는 그녀가 그렇게 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난하고, 뚱뚱하고, 소심한 아이였다.더군다나 자라서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녀가 보여주는 이상행동(?)은 8년이라는 시간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요인이 되었다. 남 앞에서 잘 서지 못하는 소심증, 심지어 아이를 가르치다가도 공포에 떨면서 교실을 뛰쳐나가는 행동이 정신이상을 진단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극히 정상이었고, 무엇보다도 책 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 작가들에게 편지 쓰는 것도 서슴지 않는 대담성, "난 꼭 시인이 되고 말겠어."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그리고 당당히 영미권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고통은 정말 남다르고 특이했다. 그러한 재닛 프레임의 사적 경험, 고통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내 책상 위의 천사'이다. 

영화는 재닛 프레임의 자서전을 의존하고 있다. 자서전 3권을 '섬을 향하여', '내 책상 위의 천사', '거울의 도시로부터 온 사절'이라는 부제를 달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러닝 타임은 160분에 달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영화의 여성감독인 제인 캠피온이 메가폰을 잡았다. 제인 캠피온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의 삶과 아픔을 꾸준히 다루어왔다. 그의 작품 '내 책상 위의 천사'는 제47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 등 8개 부문 수상, 제4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자연기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 작품이다.  

영화는 통통한 아기가 푸른 초원에서 걸음마를 하며 다가온다. 뒤이어 빨간 곱슬머리, 뚱뚱한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답답한 외모, 위축된 눈빛, 어눌한 말투가 심상치 않은 인생사를 예견하게 한다. 

친구들의 마음을 사고 싶은 재닛(알렉시아 케이 분)은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친구들에게 사탕을 사주었으나 친구들에 의해 들키고 만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은 "네 죄를 네가 알겠다!"로 일관하는 비난과 처벌을 내린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그녀가 응시할 때 느끼던 현기증.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집단 시선에 대한 심한 공포감을 각인시킨다. 물론 그것을 강화하는 또 다른 사건들이 있었다. 예컨대 오빠의 간질, 두 언니들의 잇따른 죽음과 같은 것이다. 

오빠의 간질, 언니의 익사 사고 등 불행한 가족사는 이가 썩어 들어가는 악몽에 시달리게 한다. 썩은 이를 드러내며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맡딸 역할을 해야 하는 재닛으로선 집안의 가난 구제책으로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되고 싶었던 것은 교사가 아니라 작가였다. 어려서부터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책 읽기와 글쓰기뿐이었다. 물론 여느 소녀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호기심에 찬 짓궂은 장난도 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온 건 심한 질책과 감금이었다. "한번만 더 그랬다간….",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코너로 몰랐던 여선생, 아버지의 부릅뜬 눈은 그녀로 하여금 어떤 벽감, 공포를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는 제 3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었다. 

"제3의 장소를 향하고 있으며, 그곳은 바로 신비가 시작되는 곳이다." 재닛 프레임이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는 말이다. 원치 않는 사범학교로의 진학, 장학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수업을 시연해야하는 공포는 자살충동을 일으키면서 결국 20대 8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다. 극도의 억압이 자극을 받으면서 통제 불가능의 상태로 빠진 것이다. 결국 종신 입원 환자로 결정되어 전전두엽 절제술 집도가 결정되는 위기를 맞았지만 그녀를 살린 건 글이었다.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일기를 쓰고, 시와 소설을 읽고, 작가에게 편지 쓰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그녀는 정신병원에서도 글을 쓴 것이다. 

비참한 빈곤과 행복을 한 컷에

병원에서 출간한 단편집 <석호>(1951)가 휴버트 처치 기념상을 받으며 그녀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오진으로 8년이란 시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고, 기적적으로 수술 중지와 퇴원이 결정, 비로소 작가 재닛 프레임이 세상에 알려진다. 

"글을 쓰려고 실험을 하며 나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깨닫곤 했다. 즉, 글을 써서 작가가 되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길은 무조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 꿈만 꾸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말을 늘어 놓는 게 아니라 무조건 써야 한다. 글쓰기가 여느 노동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 재닛 프레임의 말이다. 무조건 써라! 글을 쓰는 사람에게 변할 수 없는 철칙이다. 또한 내면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주문을 하고 싶다. 무조건 써라! 글쓰기는 몸의 감각과 사유의 길을 닦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치유의 지름길이다. 치유를 위해서 굳이 지름길을 택할 필요는 없지만 몸과 의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이다.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에서 두드러진 매력은 색감이다. 빨갛고, 파랗고, 푸르뎅뎅하고, 검붉은… . 사건의 전개와 정서의 환기는 색깔의 변화가 성취해내고 있다. 더벅한 빨간 머리, 온통 터져버릴 것 같은 붉은 볼은 재닛의 수줍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언니가 익사한 후의 절망감과 공허함, 외로움은 짙푸른 강물에 먹물을 풀어 넣은 듯한 색감을 연출한다. 정신병원에서 나오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 서면서의 환희와 자신감은 드넓은 바다와 짙푸른 녹음, 푸른 재킷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으로부터 실패하고 뱃 속의 아이를 낙태하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과 죄책감, 그것은 마치 언니의 익사사건이 그려내는 색감에 붉은 피를 섞어놓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에서 재닛이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의 얼굴표정은 점점 밝아지면서, '이렇게 예뻤었나'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삶으로 점철되었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니 얼굴빛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래서 노래한다. "더 이상의 뜨거운 태양도 사나운 겨울도 두려워하지 말라 네 임무는 끝났나니… ."라고. 우울한 어린 시절에 일찍이 언어가 가지는 힘을 깨달은 재닛은 평생을 글을 쓰는 삶을 살 것이라고 다짐한다. 첫 번째 소설을 완성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럽으로 떠난 재닛은 행복감에 젖은 나날이었지만 삶은 행?불행이 공존하는 법. 스페인에서 미국인 시인과의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임신을 한 재닛은 다시 절망의 늪으로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임신이 사랑을 쫓는 이유가 될 수 없고, 글을 포기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글을 쓰는데 전력투구한다. 과거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진해서 정신병원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은 정신병이 없어요."라는 진단을 받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작가란 본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탐색해 들어가야 한다."라고 한 힐러리 맨틀의 말처럼 영혼의 깊숙한 샘물을 퍼올리기 위해선 자발적인 감금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영화의 엔딩장면은 온화한 표정으로 춤을 추며 타자기를 치는 재닛 프레임에 클로즈업된다. 탁탁탁탁… . 타자기 소리의 발랄함이 그녀의 충만한 감정 상태를 대신해준다. 그녀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사랑받으려 구걸하지 않아도 돼. 내 삶은 내가 사는 거야. 더 이상 기죽을 이유 없어. 네 영혼과의 대화에만 충실해. 네가 아닌 누가 네 영혼을 돌보겠어. 영혼이 없는 글을 누가 읽어주겠어. 자, 출발!" 세상의 모든 재닛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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