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24) 제주여성영화제 다시보기② 농담과 진실 사이

영화 '토니 에드만'의 한 장면.

'가족'에 대한 해석...마음의 벽 허물고 스스로 돌봐
'살아볼 만'의 기준 "뭐가 문제야, 사는 게 다 그래"

길고 긴 추석 연휴를 보내고 증후군 극복 방법에 대한 대화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명절증후군을 이야기할 때 예전 같으면 명절 준비와 가족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주를 이루었을 텐데 올해는 다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더 많이 들린다. 오랜만에 긴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여행 다녀오는 동안 증후군을 심하게 앓는 건 혼자 생활하게 된 애완견이었다는 등. 달라진 명절 풍속도이기도 하지만 가족에 대한 개념이나 의미가 사뭇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가족이란 게 뭘까? 혈로 맺어진 관계라 정의내리기엔 부족함이 많다. 이를테면 고양이도 가족이고, 거북이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보다 고양이가 죽은 게 더 슬픈 게 사실인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가족은 뭐라고 해야 할까.  


△참을 수 없는 쓸쓸함, 허전함에 대하여

제주여성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에 보고나서도 오래 자리를 뜨지 못한 영화가 더러 있다. 그 중에 한 편이 '토니 에드만'이었다. 포스터에는 '코미디, 드라마'라고 표기되었는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괴기스럽고, 과장된 모습의 인물이 등장하는 건 사실이지만 왜 그 모습마저 슬픈지. 언뜻 보면 이 영화는 휴먼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의 장난과 괴물 같은 연기로 딸과의 화해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의 끝은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전함의 여운이 길다. 마치 그것이 인생이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영화 '토니 에드만'은 탄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토니 에드만은 빈프리트(페터 시모니슈에크 분)의 가명이다. 빈프리트는 영화의 전처의 집에서 열리는 생일파티에초대받지만 그게 딸의 생일인줄은 모른다. 혼자만 소외된 것 같은 기분에 개 빌 리가 많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 딸의 얼굴만 잠깐 보고 나온다.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 분)는해외 출장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왔지만 여전히 업무처리로 전화만 붙잡고 있다.

개 빌리는 죽었고, 빈프리트는 며칠 휴가를 내어 딸의 집에 방문한다. 회사의 이익과 관련된 중대한 업무를 맡은 이네스는 아버지와의 편안한 만남을 갖지 못하고 할 수없이아버지를 자신이 이동하는 장소로 계속 끌고 다닌다. 리셉션 장소, 백화점, 술자리까지. 결국 빈프리트는 딸에게 "네가 사람이냐?"라고 까지 말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농담이야."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농담, 참 씁쓸한 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내뱉는 말실수가 진심이라고 말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는 농담 한마디 때문에 신세망친 인물의 이야기를 내세워 언어의 허구성과 인간이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렇든 저렇든 빈프리트가 자꾸 "그건 농담이에요."라고 말할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오게 된다. 진심을 말해놓고도 그렇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처지랄까, 아니면 이러나저러나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라는 허무함이랄까.

딸에게 생밀선물로 치즈 강판을 선물하는 아버지, 자신을 돌봐줄 새로운 딸을 사와야겠다고 하는 아버지, 딸의 일정을 따라다니는 내내 말실수로 곤혹을 치르게 하는 아버지. 결국 그 아버지는 '토니 에드만'이라는 가면을 쓰고 의치를 끼운 채 이네스의 뒤를 쫒아다닌다. 이네스의 놀라운 침착성으로 타인에게 아버지의 정체성은 들키지 않지만아버지의 가면극으로 이네스의 일상은 흐트러진다. 빈프리트의 농담과 가면극은 장난의 도를 넘어서 해골 분장에서 안락사, 죽은 빌리와 똑같은 자세로 쿠케리 탈(루마니아 전통인형)을 쓴 채 공원 바닥에 누워 죽을 듯 숨을 헐떡이기까지. 하지만 그런 빈프리트의 행동은 단단하게 굳어 있는 이네스에게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한다. 결국 털복숭이 털을 뒤집어쓴 아버지를 와락 껴안으면서 오랜만에 모녀간의 사랑을 따뜻하게 확인한다. "나도 늘 시간이 있는 게 아니야."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는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면서도 나약한 언어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유령처럼 딸의 주변을 떠돌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영화 '토니 에드만'에서 가장 파격적인 장면은 아마 누드 파티 장면일 것이다. 아버지의 장난으로부터 마음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 이네스는 영업상 계획하던 생일모임에 누드파티를 제안한다. 자신의 일이 회사의 막대한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기에 매사 신중과 침착, 순발력, 과감성… 등을 보여야만 하는 과도한 스트레스가 그녀로 하여금 삶의 교착 상태로 빠지게 한 것이다. 아버지 빈프리트는 가면과 농담에 의지해 자신을 보여준 반면 이네스는 과감히 벗음으로써 자신의 삶에 도전한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노래 부르면서.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빈프리트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딸네 집에 갔을 때도 집의 창문에 놓인 작은 화병에 시선을 머문 채 사진을 찍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빈프리트는 오랜만에 화기애애해진 이네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가지러 들어간다. 이때 이네스는 그동안 내내 노력했던 이네스의 업무가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을 알린다. 순간의 기쁨을 붙잡아두려는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순간이다. 이네스는 아버지처럼 의치도 끼어보고 할머니가 남긴 모자도 써본다. 그리곤 슬쩍 내려놓는다. 모든 것은 이제 다시 시작이기 때문이다. 매순간은 한 번뿐이라곤 하지만 삶은 계속 된다는 것. 그래서 이 영화의 끝은 한없이 쓸쓸하다. 일몰을 감상하듯 삶을 삐딱하니 서서 가만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오지 않은 미래를 서성이면서. 힘들게 다리를 끌며 공원을 서성이는 노인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힘겹고 아프다.
 

다큐영화 '모락할매'의 한 장면.

△자연이 일부로 살아가다

같은 노년의 모습을 그린 영화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영화 '모락할매'는 영국 북서부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의 어느 섬에 혼자 사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잔잔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양떼들과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주면서 실랑이를 하고 있는 할머니가 정말 귀엽기까지 하다.

모락할매 나이는 86세, 이름은 모락, 사는 곳은 헤브리디스 제도의 어느 섬이다. 그녀는 태어난 곳에서 계속 혼자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가족들은 이미 죽었거나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무섭고 쓸쓸할 만도 한데 할머니는 얼굴에서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뭐가 문제야. 다 그런 거지 뭐. 사는 게 다 그래."

모락할매는 추운 겨울에도 양떼들 먹이를 주는 일에 정성이다. 눈발이 날리는 들판에 나가 앵떼들을 불러 모은다. 그중에 유독 눈이 가는 양 한 마리가 있다. 자신처럼 나이가 든 양 한 마리. "어이구, 이젠 먹는 것도 잘 못하는구먼. 먹질 못해. 힘도 없고. 자꾸 빼앗기고. 다 그런 거지 뭐." 늙어가는 양이나 늙어가는 인간이나 힘 빠지고 걸음이 느려지는 건 당연하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시 태어날 것이고. 누군가는 혼자 살고, 누군가는 둘이 살고, 누군가는 떼로 살고. 누군가는 사람과 살고, 누군가는 양떼들과 살고, 누군가는 고양이와 살고. 사는 모양새도 가지가지. 그런데 사람들은 삶에도 형식이 있고 율법이 있는 것처럼 가족끼리 꼭 붙어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락할매는 말한다. "다 떠나도 난 이 곳에 살 거야. 난 양떼들과 결혼했어."

모락할매가 사는 방식은 홀로, 단순하면서도 자족적이다. 자신을 돌봐줄 이가 없다고 한탄하지도 않는다. 자기 몸은 자신이 돌보고, 양떼들도 할 수 없다. 추워도 밖에서 자기 몸은 자기가 돌보면서 사는 수밖에. 원래 자연의 이치는 그런 것이다. 자기의 몸은 자기 스스로 돌보기.  자연에게 신은 자기 자신이다. 모락은 스스로를 돌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온 자신에게 '좋은 삶'이었다고 말한다.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의 섬처럼 그녀의 삶도 푸르고 거칠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래도 살아볼 만 했다고. 죽는 날까지 아마 살아볼 만 할 거라고. 그녀의 하얀 이가 더더욱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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