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2월호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의 국회통과를 개탄한다'라는 이진우(李珍雨) 변호사의 글이 실렸다. {월간조선}은 이 글에 '국군을 배신한 대한민국 국회'라는 지극히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놓았다. 바로 뒤에는 이현희(李炫熙) 교수의 '제주4·3사건의 본질을 다시 말한다'는 글도 실려있다.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을 비판하면서 '4·3은 공산폭동'임을 강조하려는 것이 이 글들의 핵심 내용이다. {월간조선}은 돈주고 사 볼만한 책이 아니라고 여겨왔지만, '역사의 기록물'을 보관하기 위해 사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진우 씨와 이현희 씨의 글은 오로지 억측으로만 점철된 궤변들이다. 그러나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은 반론 게재 요청을 묵살했다. 조씨는 반론 이유를 밝히는 필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4·3이 공산폭동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다고 보느냐. 그것부터 밝혀라"고 다그쳤다. 그러더니 "4·3이 공산폭동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로 지면을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두 분의 글은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논리적으로 주장을 편 것"이라고 두둔했다. 아울러 조씨는 "나도 광주사건 취재 때문에 회사에서 짤린 사람"이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월간조선}과 조갑제 씨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렇게까지 흑백논리로 단순한 사고를 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튼 두 사람의 글이 '얼마나 사실과 다르며 논리를 갖추지 못했는가'를 따져보자.

우선 이진우 변호사의 글부터 살펴보면, "4·3특별법은 공산폭도들에게 면죄부와 함께 사랑의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반면 이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피와 땀 그리고 생명을 바친 대한민국 국군, 경찰관들에게는 '무차별 양민 대량학살'이라는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게 글의 논지이다. 사용된 어휘들도 희한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글은 잘못된 내용을 사실인양 멋대로 전제해 놓고, 그 전제를 바탕으로 결론을 맺는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을 갖고 있다. 그의 글만을 읽은 독자들은 '도대체 대한민국 국회가 어쩌자는 것이냐'며 우려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탄식과 경악을 금하지 못한" 4·3특별법 그 어디에도 "대한민국 국회가 공산게릴라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국군과 경찰을 양민 대량 학살범으로 정죄한" 내용은 없다. 단지 진상을 규명해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최소한의 대의명분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법률 전문가'의 눈에는 없는 내용들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진우 씨는 지난 1997년 {제민일보}의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보도에 대해 정정보도와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씨의 변호인이기도 하다(제민일보의 보도에 대해서는 {4·3은 말한다 ⑤}(전예원, 1998) 부록 [왜 4·3계엄령은 불법인가] 참조). '일제의 계엄령이 4·3계엄령의 근거'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월간조선}에서도 4·3계엄령이 합법이라고 강변하고 있는데, 왜 그토록 4·3계엄령에 집착하는 지는 그가 앞서 {법률신문}(1999년 12월 9일자)에 기고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고문에서 그는 "계엄령이 적법한 것이었다고 하면 '양민에 대한 불법학살'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그 속내를 드러냈다. 참혹했던 양민학살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가당치 않은 주장이다. 오는 2월 24일 이진우 변호사가 필자를 상대로 반대신문할 예정이다. 제주지법 법정에서의 만남을 고대하면서 이만 말을 아껴야겠다.

다만 그가 글 여러 곳에서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한마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라면서 "자유민주주의는 법과 질서에 최고의 가치를 인정하는 제도"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송두리째 뒤집으며 정권을 찬탈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했던 5공 정권에 가담해 민정당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자신의 경력을 상기해 다시는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하지 말길 바란다.

이진우 씨의 글은 앞서 {법률신문}에 실린 그의 기고문을 통해 이미 그 수준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울 게 없었지만, 이현희 교수의 글을 읽기 전에는 몹시 긴장했었다. 이현희 씨가 다름아닌 성신여대의 '사학과 교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거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4·3 왜곡사례를 지적하며 교과서 집필자인 이씨를 비판한 바 있기에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이현희 씨가 지난 1991년 필자와 전화인터뷰 할 때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교과서에 나오는 4·3부분을 보면, '6·25남침'이란 장 아래 '공산집단의 남한교란'이란 제목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 부분도 선생이 쓰신 겁니까.

"제가 쓴 걸로 생각되는데..."

-사실 4·3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용어문제도 그렇고. 더욱이 성격규명에 앞서 진상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제민일보사에서는 4·3관련 기획물을 연재하고 있고, 석사학위 논문 2편과 존 메릴의 논문이 나와 있습니다만.

"그러면 연재물을 일단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검토하지요. 그런데 논문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서울대학교 양한권 씨의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1988)와 고려대학교 박명림 씨의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1988)입니다. 그런데 논문의 내용이나 실제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취재한 바로는 교과서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고 편향된 것이란 느낌입니다.

"그 때는 모두들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에..."

-우리가 아쉬운 점은, 교과서라면 정사로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인데....

"그건 그래요. 내가 쓸 때만 해도 그런 자료도 안 나왔고, 예전 자료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선생이 4·3 부분을 쓸 때는 결국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쓰신 겁니까.

"그렇죠. 그 때는 자료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4·3이 해방공간의 격변기에 발생한 사건이긴 하지만, 과거 관변자료를 보면 매우 복잡미묘하게 전개된 4·3을 남로당 중앙당이나 심지어 북한 소련까지 연계시키려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여하튼 정확히 기록해야지요. 그래야 후세에 연구하는 사람들도 4·3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4·3은 말한다 ②}(전예원, 1994), 411∼412쪽 참조>

오래 전 인터뷰한 내용만 갖고 시비할 건 못된다. 비록 당시엔 관련 논문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그 후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새 많이 공부했을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10년 전 그랬던 그가 '4·3사건의 본질을 다시 말한다'니 눈길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4·3은 소련 지령 하에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한 유혈폭동"이라는 매우 새롭고 놀라운 주장도 하고있어 더욱 관심이 갔다.

이 씨는 '사학과 교수'답게 사건 날짜와 시간, 장소, 인명 등 구체적인 '팩트'를 나열하며 그것들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니 일반 독자들은 믿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 씨가 열거한 팩트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6쪽에 불과한 그의 짧은 글에서 무려 20여 군데의 큰 오류가 발견됐다. △해방 후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15만명이 귀환 △귀환자 중엔 중국 팔로군 출신 포함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구성, 모든 투쟁을 지휘하도록 독려 △민전(民戰) 도당위원회, 서울 중앙공산당의 지시로 파괴공작 자행 △9연대 문상길 중위, 제주경찰서 모두 습격 △1947년 6월 6일 세화지서 경찰관 2명 사살 △안덕지서장 무참히 살해 △육지에서 무기와 생활용품을 해로를 통해 지원 등 오직 허구로만 쓰여진 자잘한 오류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밖에 '조선공산당 제주도 인민위원회', '민전(民戰) 도당위원회' 등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쓰지 못할 희한한 단체 명칭도 등장한다. 인민위원회는 조선공산당의 산하단체가 아니며, 도당위원회는 민전의 산하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이니 그와 현대사 인식에 대해 고급스런 논쟁을 한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다만 제주도 충혼묘지 관리를 위해 '세화지서 경찰 사살 건' 하나만 언급하자. 사건이 발생했다는 1947년 6월 6일은 '제주4·3'이 발발하기 9개월이나 전인데, 이 때 경찰 2명이 사살됐다면 매우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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