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26 세기의 여성감독② 제인 캠피온 편

문학작품이든 영화이든 스토리를 간추려 잘 말하기는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런 것 같다. 대신에 한 문장, 시구 하나, 어떤 이미지, 문득 흘러나오는 한소절의 음률 등의 여운이 남는 경우는 꽤 있다. 그래서 스토리 전체가 어떤 감동을 주기 보다는 어떤 하나의 요소가 깊은 울림을 주거나 통찰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회화는 여전히 예술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는 시와 음악, 회화, 춤의 특질들이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전율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1954~)은 영화 <피아노>(The Piano, 호주/프랑스/뉴질랜드, 1993)로 잘 알려진 여성 감독이다. 말을 잃어버린 여성 캐릭터, 해변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음률, 모래 위에 새겨진 음표, 도끼로 잘려진 손가락, 밧줄에 묶여 바다에 빠진 에이다(홀리 헌터 분)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제인 캠피온은 1954년 뉴질랜드 웰링턴 출생으로 고고학, 회화, 무용을 공부한 예술가이다. 1980년대 말 첫 장편영화 <스위티>(Sweetie, 1989)를 발표하면서 세계영화계에입성한다. 영화 <스위티>는 평범했던 한 소녀가 목격하고 경험하는 부조리한 가족 관계와 시대 상황을 그리고 있다. 독특한 색채와 음악, 초현실주의적 영상이 독창적이다.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은 LA 비평가상을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여러 수상 성과를 거둬냈다. 그의 두 번째 영화는 <내 책상 위의 천사>(An Angel At My Table, 1990)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고통과 정신적 혼란을 겪다 마침내 작가로서의 길을 걷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비롯하여 7개 부문을 수상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이 <피아노>이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들은 대체로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이야기에 동일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제작한 거의 모든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강제, 억압, 강요와 같은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들의 정서는 대체로 수치와 고독, 우울과 불안에 시달린다. 하지만 잃어버린 정체성과 자유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체적이다.

영화 <피아노>는 제인 캠피온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대표작이다. 1993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첸 카이거(Chen Kaige)의 <패왕별희>와 공동 수상)을 시작으로 1994년 아카데미 9개 부문 노미네이트와 3개 부문 수상, 제6회 시카고 비평 협회상 외국어영화상 수상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30여개의 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영화는 19세기말 뉴질랜드 마오리족 마을 배경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에이다는 어린 딸을 데리고 아버지의 강요로 스튜어트(샘 닐 분)라는 남자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여섯 살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오직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피아노, 어린 딸과는 수화와 메모지에 쓴 글자로 소통이 가능하다.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남자가 사는 마오리족 마을로 가게 되는데, 자신의 분신과 같은 피아노를 끌고 바다를 건너게 된다. 풍랑에 쓸리면서 까지 피아노를 해변에 내릴 수 있었지만 남편은 피아노를 집까지 가지고 가는 건 무리라고 한다. 마오리족을 동원해 이삿짐을 나르는데,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피아노는 해변에 버려지게 된다.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에이다는 남편 친구 베인즈(하비 케이텔 분)의 도움으로 해변에 버려진 피아노를 보러간다. 그리고 베인즈는 스튜어트에게 피아노를 사들여 교습을 핑계로 에이다를 불러들인다. 둘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결국, 에이다는 손가락이 잘리고, 둘은 마을에서 쫓겨난다. 풍랑의 위협을 느낀 에이다는 피아노를 바다에 버리고 하는데, 피아노를 묶은 밧줄에 그녀의 발이 감겨져 있었다.

<피아노>는 스토리보다 회화적 영상과 피아노 운율이 정말 아름다운 영화다.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해변의 풍광과 대비되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 에이다는 스스로 세상과의 단절, 거부, 저항을 침묵으로써 응수한다. 그리고 피아노와 딸 플로라(안나 파킨 분)하고만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말로분출하지 못한 마음의 소리는 피아노 건반을 꾹꾹 누르며 토해낸다. 그러한 그녀의 감정, 욕망, 의지를 알아차린 것은 베인즈였던 것이다.

영화는 이분법적 구도를 교묘하게 엮는다. 스튜어트와 베인즈로 대표되는 백인 이민자들의 식민지 개척, 이로 인해 억압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마오리 원주민의 삶이 여성 에이다의 삶을 닮았다. "피아노는 내 재산이에요."라고 강력하게 반발해보지만 먹혀들지 않는다. 여성의 것은 남성 재산의 일부로 치부돼버리는 현실의 불합리성, 그렇게 갈취해간 피아노로 거래를 하자고 꼬드기는 베인즈 역시 내면화된 남성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힘에 저항하는 방법은 피아노 선율로 은유하는 예술이거나 사랑일 텐데 그 또한 아직 희망이라기 일컫기는 이르다.

<피아노>에 이어 제작된 영화는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 1996)이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자본과 허영, 사랑에 목숨을 건 남성의 이야기라면 그 대척점에 『여인의 초상』이 있다.

영화는 19세기 영국 런던, 스페인 플로렌스와 그리스 로마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이자벨(니콜 키드먼 분)은 자아의식이 강한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에게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로부터 구애를 받지만 거절하고 자유로운 삶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피아노 연주를 하는 멜 부인(바바라 허쉬 분)에게 이끌린 이자벨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오스먼드(존 말코비치 분)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결혼한다. 오스먼드는 이자벨에 대한 사랑은 없었다. 물려받은 돈 때문에 결혼을 한 거였고, 그와 멜 부인 사이에 딸이 있었다. 

"난 내 남편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이자벨이 사촌오빠 랠프에게 한 말이다. 사랑에 눈이 먼 이자벨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오스먼드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이자벨은 이성을 잃고 자꾸만 오스먼드에게 집착하게 된다. 자아의식이 강하다고 하는 여성에게도 내면화된 의존성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떨쳐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이 그녀로 하여금 생존본능을 더욱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인 캠피온 작품의 일관된 주제는 여성의 정체성, 욕망의 문제이다. 회화적 이미지와 특유의 감성적 연출력과 더불어 원작에 대한 신뢰는 작품의 완성도를 기하고 있다. 앞서 다룬 작품을 비롯 <인 더 컷>(In the Cut, 2003, ) 모두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이, 여성을 위한, 여성 그 자체를 위한 영화를 만든다는 일관된 투지는 더욱 진정성을 갖는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