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27) 세기의 여성감독③ 클레어 드니 편

'35 럼 샷'( 2008)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뒤끝 있는 게 흠이다. 하지만 예술은 뒤끝이 생명이다. 책을 읽어도 곱씹어지는 문장이 있거나 어떤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작품이 생명력이 있다. 이를테면 플로베르의 작품 「보바리 부인」을 읽은 독자들은 각자의 엠마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까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만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다. 그만큼 강렬하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 영화가 끝나도 일어서고 싶지 않은 영화, 어떤 내용인지 추려 말할 수는 없으나 어떤 느낌, 분위기, 음악, 대사, 미장센 등이 작품의 주제나 내용을 압도하거나 관통하는 경우가 있다.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그렇다. 뒷맛이 씁쓸하다고 해야 할까, 한없이 걷고 싶어진다고 해야 할까. 

'35 럼 샷'(2008)에서 전철기관사 리오넬(알렉스 데스카스 분)의 구릿빛 얼굴과 표정없는 응시의 눈빛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있어 설명의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2014)의 첫 장면은 또 어떤가. 벽을 타고 쏟아지는 장대비, 하얀 와이셔츠의 사내가 넥타이를 동여매며 응시하는 종이봉투와 구두 한 켤레, 창살 너머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사내의 오묘한 표정. 걱정스러움인지 비통함인지, 복수에 참인지 딱히 정의내리기 어렵다. 그것이 클레르 드니 영화의 특징이자 시적 언술이다. 그녀의 말대로 '눈맞춤의 욕망'인 것이다. 

클레르 드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감독이다. 한국과의 인연도 꽤 깊어서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한한 바 있고, 회고전도 여러 번 있었다. 194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일흔이다. 클레르 드니의 작품에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꽤 여러 편이다. '멋진 직업'(1999), '백인의 것'(2009) 등이 이에 해당되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당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인 카메룬, 지부티 등에서 생활한 경험이 영화에도 크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프리카를 신화적 공간으로만 바라본다거나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고발하는 데만 집착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물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물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선택할 수 있는 의지적 주체인가. 그런데 왜 다수는 원치 않는 곳에서 떠돌고 있는가. 인간은 어쩌면 욕망 덩어리 그 자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의는 욕망인가 의지인가. 인간은 자신이 타고난 환경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들. 

영화 '35 럼 샷'(2008)은 2008년 베니스영화제에 소개된 작품으로, 지하철 기관사 리오넬(알렉스 데스카스 분)과 그의 딸 조세핀(마티 디오프 분)의 담담한 일상을 그린 영화다. 기관사인 리오넬은 딸 조세핀과 프랑스 북부 변두리 동네에서 살고 있다. 기관사라는 직업이 의미하듯, 매일 매일이 반복되는 일상, 긴 노동에 지친 소시민들의 멍한 눈, 하루 종일 고독이라는 친구와 말벗이 되고만 리오넬. 

부둥켜안은 순간이 곧 서로의 이별

리오넬은 가끔 친구들과 럼 샷을 즐기기도 하고, 그를 좋아하는 여자 친구의 호의도 받지만 매사가 덤덤하고 규칙적이다. 딸을 생각해 정시에 퇴근하고 밥을 지어놓기도 한다. 그렇다고 딸과 살갑게 지내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말없이 마주 앉아 밥 먹고, 치우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벽을 마주한다. 건넛방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뿐이다. 아니면 공허한 밤하늘을 바라본다거나. 지나가는 전철, 그 안에 얼핏 스치는 무수한 인간 군상들에 시선이 머문다. 어딜 봐도 뾰족한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딸 조세핀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레오를 좋아하게 된다. 리오넬은 조세핀이 변변한 직업이 없는 레오와 결혼하게 됐다는 게 탐탁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정확한 감정은 알 수 없다. 그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건 무리다. 그건 조세핀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결심하면서도 기뻐하는 내색은 없다. 

남자 친구 노에(그레구아르 콜렝 분)도 마찬가지. 모두는 체념과 믿음 사이,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한다. 씁쓸함, 안도감, 슬픔, 애틋함, 미안함, 애석함 등. 단순히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만은 아니다. 사는 게 그렇다. 하급노동자로 겨우 버티는 삶, 대학을 나오고, 기술을 가졌다고 해서 별다를 바 없는 삶.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삶. 죽을 때까지 겨우 버티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전철처럼 지나간다. 오랜만에 외출한 파티에서 리듬에 맞춰 흐느적거리는데, 춤마저도 자유롭지 못하다. 춤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상이 아니니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스꽝스러워서 웃는다.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하지만 춤은 마음 내키는대로 한 번 살아봐야 하는 용기를 준다. 조세핀이 남자 친구를 따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날도 춤을 춘 날이고, 리오넬이 낯선 여자와 눈이 마주친 날도 동일하다. 부둥켜안은 순간이 서로의 이별을 마음먹게 한다는 역설. 이것이 클레르 드니적 어법이다. 

'돌이킬수없는'.

의지적인 인간이 어리석은 비극 자초

클레르 드니는 끊임없이 경계와 탈주를 실험한다. 공간을 넘어, 관습과 도덕을 넘어 알 수 없는 결말로 치닫거나 주인공을 의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영화 '백인의 것'(2009)은 내전에 휩싸인 국가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백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백인/흑인=강자/약자'의 관념적 도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더러운 백인들이 우리를 멸시했어. 사실 그들은 허세에 넘치고 오만하고 무지막지한 놈들이야. 놈들에게 이 아름다운 땅은 아까워. 고마워할 줄도 모르잖아"라는 위협적 주장에도 커피농장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는 여인, 그 속내는 무엇인가. 프랑스 식민지국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여성, 그녀의 선택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보면 인간욕망의 본질적인 물음과 맞닿지 않을까. 뿌리에 대한 욕망, 권력에의 의지, 생명에 대한 경외 등. 영화 '돌이킬 수 없는'(2014)은 더 의심하게 만드는 영화다. 

유조선의 선장으로 일하는 마르코(뱅상 랭동 분)는 여동생 상드라(줄리 바타이 분)의 도움 요청을 받고 급하게 고국으로 돌아온다. 조카 쥐스틴(롤라 크레통 분)은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여동생의 남편은 자살하고만 것이다. 마르코는 여동생의 가정을 파괴한 범인을 찾아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표적은 사업가 에두아르(미셸 쉬보르 분). 그는 에두아르의 젊은 부인 라파엘(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 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데, 라파엘과 친밀해지며 복수의 양상은 묘하게 흐르고 만다. 

결국 사건에 대한 정확하고 이성적인 파악 없이 분노에 찬(오히려 감춘) 복수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만다. 악을 물리치겠다는 영웅주의는 나르시즘을 낳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에서 분노와 공포와 이성과 멜랑콜리, 성욕과 인격의 경계는 없다. 클레르 드니가 클로즈업 하는 얼굴에는 이 모두를 담고 있다. 그 배우가 알렉스 데스카스이든 뱅상 랭동이든 상관없이. 

그러니까 클레르 드니 영화의 미덕은 천연덕스러운 대담함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의 미덕과 악덕은 어찌 보면 한끝 차이임을, 마치 데칼코마니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의지적인 인간이 가장 어리석은 비극을 자초하기도 한다는 것. 그러한 역설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머묾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영화엔 시선을 붙잡아두는 캔버스를 여럿 설치해 두는 편이다. 최소한의 대사, 롱테이크 장면에서 펼쳐지는 햇살의 군무, 벽을 뚫을 것 같은 장대비, 그 파고를 타고 넘는 베토벤 교향곡 제7번 2악장. 그것들이 언어의 한계를 대신하고 있다. 클레르 드니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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