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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미래' 투자 오늘 제주의 밑돌로해녀공동체를 엿보다 21. 유네스코 후속작업 6 공유된 민속지식
고 미 기자
입력 2018-03-13 (화) 15:20:09 | 승인 2018-03-13 (화) 15:25:09 | 최종수정 2018-03-13 (화) 19:59:32
물질하고 돌아오는 해녀. 사진 신준철 작가

1세대 일본 출향 해녀 노동력 아닌 '노동 능력' 의미 전해
공덕비, 학교바당·기성회바다 등 지역 교육 연결고리 뚜렷

바다 건너 얻은 '세상 보는 눈' 교육열 재생산·투자 이어져

제주해녀 공동체가 지닌 힘의 근원에는 '배움'이 있다. 해녀 자체도 할머니, 어머니로 이어지는 민속지식을 습득해 바다에 나섰고, 목숨을 지켰다. 힘든 물질을 감수했던 배경에는 '생계  유지'라는 목적이 분명하지만 가족의 미래, 무엇보다 '배움'에 대한 투자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해녀문화를 다음 세대로 연결하는 장치 역시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물질 기술 그리고 '교육열'전파

지난 2015년 찾은 1세대 재일제주인이자 보소 반도 '마지막'해녀인 홍석랑 할머니와 그 주변 해녀의 삶은 앞서 제시한 논리를 증명하는 퍼즐 중 하나다.

한경면 금능리 출신의 홍 할머니는 1944년 20살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국민 징용령에 의한 '모집'형식으로 일본에 끌려온 뒤 군수산업에 동원됐다. 화약 등의 원료가 되는 감태 채취를 하는 이른바 '징용물질'을 했다. 종군위안부 소문이 흉흉했던 시절이었다. 그대로 끌려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는 말을 피해 선택한 길이었지만 고향 길은 멀고도 험했다. 

홍 할머니는 재일 조선인 2세 김영.양징자씨의 「바다를 건넌 조선의 해녀들」(1988·㈜신숙서방)에서 처음 존재가 확인됐다. 책에서 두 연구자는 일본 치바현 보소반도 8개 지역에 출가 해녀 28명이 물질을 하고 있다고 조사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남은 이는 와다우라의 홍 할머니뿐이다.

홍 할머니의 일본 물질 사정은 비슷한 시절 아마로 바다를 나눠썼던 오카다 후미코 할머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리하자만 일본 아마는 가족(부녀) 또는 부부를 중심으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남성이 주도적이었단 얘기다. 바다가 거칠었던 보소 반도 해역에서는 남성들이 해산물을 채취했고 여성들은 해초작업을 했다. 하지만 제주해녀들이 남성만큼 적극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 둘 깊은 바다를 욕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능력'이라는 경제적 가치의 판단 기준을 전파한 것이다.

제주해녀들을 친구 어머니로 기억하고 있는 이치하라 야치요씨(72)는 일본 어머니들에게는 없었던 교육열에 대한 인상을 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던 것이 모습이 다른 집들과 달랐다"고 했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자식들이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온평리 해녀 공로비.

△ '공유된'지식의 실현

몸은 고향을 떠나 있어도 태어나 자라며 체화한 것들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를 일부 학자들은 '공유된(shared)'의 의미로 해석한다. 할망바다(마라도 향약), 학교바당(성산읍 온평.오조리), 이장바당(조천읍 신흥리) 같은 풍습이나 '풍조(風藻)'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중에서 교육과 관련한 것들이 비교적 오래 흔적을 남겼다.

해녀들의 역할은 바닷가를 낀 읍·면 마을 학교나 마을 어귀에서 찾을 수 있다.

잠수회(해녀회)에서 성금을 내 학교 부지를 마련했다거나 마을 공공시설을 짓거나 길을 냈다는 내용을 담은 공덕비다.

해녀박물관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온평리 '해녀 공로(덕)비'에는 해녀들이 학교바당에서 채취한 미역을 팔아 학교 신축공사와 재건, 전기가설과 같은 일들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6년 개교한 온평국민학교는 교실이 4개 밖에 없어 심지어 한 교실에 4학년까지 합반 수업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는데 해녀들이 미역판매 대금을 기부하면서 학교가 증축됐다. 1950년 화재로 목조건물이 전부 소실되었을 때도 해녀들이 미역판매 대금을 내놔 이듬해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제주의 해녀」(제주도·1996)는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에도 해녀회의 공금은 큰 몫을 맡는다'는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세상 보는 눈을 얻다

마을지인 「추자도」(1999)나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2011)에도 비슷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추자도 부속섬인 사수도 '육성회바다'는 추자초등학교의 전신인 최성학교 때부터 학부모들이 관리했다. 사수도 물질은 일제 강점기 시작됐다. 해방 이후 추자국민학교 교장과 학부모 회장이 사수도에서 얻은 물질 수입을 학교발전기금으로 삼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아직도 대서리와 영흥리 잠녀들이 2년에 1번 돈을 모아 추자초 운영위원회로부터 섬에서 작업하는 권리를 산다.

우도에서는 공동어장의 일부를 '기성회바당'로 정하고 공동출자·노력을 통해 학교운영 자금을 마련했다. 기성회 바당은 1970년 초등학교 육성회비가 폐지되면서 사라졌다.

분명한 것은 '경제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깥물질을 통해 뭍과 세상을 배운 해녀들을 중심으로 배움의 필요성에 눈을 떴던 것이 주효했다. 적어도 내 자식이나 손자 등은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고 큰물에서 유영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아낌없이 주머니를 열었다는 얘기다.

1932년 국내 최대 여성항일운동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위해 일어섰던 해녀항일운동도 '야학'을 통해 세상을 배웠던 해녀들이 주도했다.

고 미 기자  popm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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