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지방기념물 13호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지 복원의 중요성과 현대적 의미를 규명하는 대규모의 학술대회가 학계와 불교계 도민들의 관심 속에 26일 오후 그랜드호텔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제주불교사회문화원(원장 시몽) 주최,법화사지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김승제) 주관으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는 ‘신해양시대 제주도 국제자유도시 건설에 따른 법화사지 복원의 현대적 의미’라는 주제로 김성훈 장관(이용우 해양수산보 장보고 기획단장 대신 표)의 기조발표 ‘국제자유도시와 법화사 복원’과 10명의 주제발표와 토론으로 이어졌다.제주대 고창석 교수가 좌장을 맡아 진행한 이날 학술대회의 주요 주제발표와 토론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산동반도·완도·제주의 법화사

▲장보고와 법화삼사(法華三寺)(김문경·숭실대 명예교수)=장보고는 신라인의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기원을 이룩했던 그 시기를 대표한 매우 흥미롭고 경이로운 인물이다.장보고는 산동반도 적산촌과 우리나라 청해진,그리고 일본의 하카다에 무역근거지를 두고 황해·동중국해에 횡행하던 크고 작은 해상세력 집단을 통제하고 그의 세력권 아래에 두었다.장보고는 820년을 전후해서 적산촌에 신라승원인 법화원을 세웠는데 승속 등 29명이 상주하면 연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대장전을 소유하고 있다.이 곳은 당시 산동반도 일원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의 신앙의 중심지였을뿐 아니라 무역의 중심지였고,외교의 전초기지로서 대단한 역할을 해낸다.

 완도 장좌리에서 상황봉으로 오르는 큰 골 오른쪽에 고려때 창건되었다는 법화사,서귀포 하원동 법화사가 모두 장보고가 세운 절이라는 주장이 많다.장보고가 살았던 시대를 전후한 아시아 세계에서의 법화사상의 유포와 해상교역관계를 생각하면 근거없는 이야기도 아니다.당시 탐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문물을 교류했을 뿐 아니라 당과도 교역관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明), 법화사 동불(銅佛) 요구

 ▲조선초기의 대명관계와 제주법화사의 동불(이재룡·숭실대 명예교수)=조선 건국초에는 대명 자존의식이 강했다.태조대에 정도전을 중심으로 요동정벌계획을 추진한 바 있고,이에 명은 위압적으로 표전문제로서 견제하였다.태종대에는 두만강유역 여진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명사이에 각축이 벌어졌다.태종초까지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두만강 유명 통멍거티무우르 등 여진 세력이 태종 5년 5월에 명에 입조할 것을 약속하자 조선이 명의 초무에 응한 여진에 대한 응징으로 경원 교역을 중단하고 있었다.이에 명은 태종 6년(1406년) 4월에 묵시적으로 제주도영토권마자 내비치며 법화사 동불을 요구했고,아울러 만산군민의 송환 및 여진 가속송환 등을 요구했다.
요컨대 명의 제주법화사 동불 요구는 여말이래 영토분쟁의 여파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제주도, 고대부터 해양항로 센터

 ▲제주도를 거점으로 한 고대 동아지중해의 해양교섭에 관한 연구(윤명철·동국대 교수)=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항로들은 제주도 해역을 거쳐갔으며,특히 한반도 남부를 거쳐서 항해하는 선박들은 반드시 한라산 등을 물표로 삼아 항해하였다.제주도는 방사상 형태로 뻗어가는 해양항로의 센타였으며 이 항로를 따라 형성되는 물류체계의 거점지역이었다.특히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왕성하게 해양활동을 했던 장보고 시대에 제주도는 중요하고 의미있는 거점역할을 하였을 것이다.독특한 지리적인 조건과 해양환경으로 인하여 사방에서 다양한 문화가 제주도로 들어왔으며 일부는 제주도문화의 영향을 받은채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청해진은 '국제자유도시'

 ▲제주도국제자유도시화와 장보고의 법화사=장보고의 해상무역의 본부인 청해진 국제자유도시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크게 두지역으로 구성된다.즉 청해진과 함께 제주도를 중심으로한 서남해안과 중국 적산포만을 중심으로하는 산동반도 연안이다.이들 양 지역은 당시 나당 교역로의 양단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양국의 연안 및 일본으로 연결됨으로써 장보고의 해상무역에 있어서는 최상의 근거지를 이뤘다.이는 동북아해상을 내해로 하는 환황해 3국을 국제적으로 연합하여 경영관리하는 독특함을 지닌 일종의 국제적인 자유도시국 기능만이 그 전개가 가능했으리라 본다.장보고가 제주도에서 활동했다는 문헌상 기록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장보고는 중국당나라 천태종의 영향을 받아 완도의 상황봉과 중국 적산,제주도 서귀포 하원동에 그의 본원사찰 법화삼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장보고의 제주법화사 건립은 장보고의 활동영역이 청해진,중국,일본 뿐만 아니라 제주도까지 뻗쳤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유물통해 중창시기 파악돼

 ▲제주 법화사지의 고고학적 연구(강창화·제주대 박물관 연구원)=법화사지는 크게 건물지구역과 연지구역으로 나누어진다.건물지 구역은 건물지와 기타시설지의 중복관계,유물출토상황으로 미뤄 4차 시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1차 시기는 특수건물이 들어서는 시기로 법화사의 창건시기에서 중창시기인 1269년까지인데 12세기 이전에 법화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시기다.중창을 알리는 명문기와,10∼11세기 유물로 판단되는 청동등잔 등이 페와무지에서 출토됐다.

 2차시기는 1269년부터 1400년경으로 제주가 원의 지배하에 이뤄지고 탐라총관부가 설치된 후 원에 의해 중창된 사찰건물이 존속했던 시기다.법화사의 가장 전성기다. 3시기는 1400년경부터 1600경까지로 원관 관련된 건물이 허물어진 다음 시기로 이전 시기 건물의 기와와 초석 등이 이때에 신축된 건물에 사용됐음을 알수 있다.건물의 기단석렬에 사용된 석재,건물지의 방향,내부 성토상태과 이전 시기와 전혀 달라 축조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4차시기는 1600년이후로 18세기 이후의 후기백자 사용시기와 맞물린다.이 시기의 건물지는 모두 초가로 판단되는데 화초나 채소 등을 재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계단상유구,무너져내린 외곽담장,뚜렷하지 않은 배수시설등이 발굴됐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는 김일우(탐라대 강사) 김동전(제주대 교수) 김형근(목포해양대 교수) 부영주(제주일보 편집국장) 한성욱(송광사 성보박물관 연구실장)씨 등이 토론에 참가했다.<김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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