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의 역사 속으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원나라)은 동서양을 휩쓰는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세계 지도를 바꾸어 나갔다.

일찍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거의 정복한 몽골은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30여년간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해 왔다.

이에 고려조정은 '강화도'를 임시 왕도로 삼아 강대한 침략군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에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고려를 지키고자 원종 11년(1270) 군사를 모아 대몽항전을 결의했다. 

삼별초(三別抄)는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을 말한다. 좌별·우별초의 전신은 야별초(夜別抄)다. 

최씨 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많아지자 이를 단속키 위해 힘세고 날랜 군사들을 모아 야별초라는 사병(私兵)을 만들었다. 그 군사의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뉜 것이다. 신의군은 몽골군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해온 자들로 구성된 부대로 당시의 최고 정예 군사였다.

강화-진도-제주도 대몽항쟁
삼별초는 결속력을 다져 몽골에 대항해 고려의 복속을 차단하는 구국의 길로 나섰다. 삼별초의 기세는 강화도를 벗어나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삼별초군은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해 용장성을 근거지로 항전했다. 그러자 고려 정부와 몽골은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김방경과 몽골의 장수 흔도, 홍다구 등으로 여몽연합군을 만들어 진도를 공격했다. 여몽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자 김통정 장군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원종 12년(1271)에 제주도(탐라)로 들어왔다.

삼별초는 이곳에 토성을 쌓고 다시 몽골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제주도를 항쟁의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적의 상륙 예상지인 함덕포와 명월포의 지세를 고려해 그 중간 지역인 항파두리에 점토와 현무암을 이용해 4㎞의 토성을 쌓고 성내에는 건물을 지어 삼별초의 근거지로 삼았다.

'제주삼별초' 최후의 혈전
이후 원종14년(1273)에 여몽연합군 1만여명은 160여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탐라정벌에 나섰다. 추자도에서 양동작전을 펼쳐 비양도로는 30여척의 군선, 함덕포로는 나머지 100여척의 군선을 이끌고 공격했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김통정 장군은 부장급 장수 70여명을 데리고 한라산 붉은오름에 피신해 최후의 혈전을 벌이다 모두 전사하고 홀로 남게 되자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제주삼별초'의 항쟁은 1273년 4월(음력)에 끝나게 된다.

삼별초 군사들이 세계 강대국인 몽골과 맞서 끝까지 항쟁했다는 것은 고려 무인의 드높은 기상과 호국결의를 보여준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의 반전-엇갈린 평가
'고려사'에서는 삼별초에 대해 '권신이 권력을 잡고 그 발톱과 이빨로 이용'한 것이 삼별초라고 했다. 이 삼별초가 무인정권이 무너진 시점에 고려 왕권에 대해 명백하게 대항한 반란 사건이 삼별초였다.

'고려사'의 부정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삼별초의 난'을 대몽항쟁사의 중대 사건으로 정리하고 평가한 1940년 김상기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매우 큰 인식의 전환이다.

1990년대 이후 학계에서는 보다 다양한 관점이 등장했다. 삼별초가 외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 '민족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또 삼별초 항전을 지나치게 흑백의 논리로 이해하는 데 대한 경계, 삼별초의 민족주의적 의의를 부정하고 민중적 의의를 강조하는 경우, 혹은 삼별초 항전을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경우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삼별초항전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다시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심 없이는 뜻 이룰 수 없다'
특히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온 것을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당시 제주도민 처지에서는 삼별초나 몽골 모두 외세라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국사적으로는 대외항쟁의 자주성을 보여준 항전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제주의 역사는 삼별초 입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며 삼별초가 제주도에 처음 진주할 당시 해방군으로 인식됐지만, 이후 여러 방어 시설의 구축, 선박의 건조, 군량 확보 차원에서 무리한 약탈을 일삼으며 민심을 잃었고,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제주도민들은 삼별초나 몽골로부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양면적 평가는 오늘에 이르러 역사를 읽는 다양한 접근법과 이해로 해석된다. 

삼별초 최후의 거점인 '항파두리'를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망명정부의 도성(都城)으로 축조기법 등에서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하는 이도 있다.

제주항파두리 항몽 유적 사업
한편 항몽 유적지 조성 사업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은 호국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며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대대적으로 관련 유적을 찾아내 보수하는 작업을 벌였다.

항파두리 유적지도 그 산물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 지시로 정비사업이 일사천리로 추진됐고, 준공 뒤에는 정부 인사들이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들르는 '호국의 성지'로 성역화 됐다. 

2000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제주도를 방문했던 북한의 고 김용순 노동당 비서도 항파두리를 방문해 삼별초의 투쟁을 기리는 글을 방명록에 남기기도 했다.

김일우 소장.

김일우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인터뷰

"제주에서 벌어진 삼별초 대몽항쟁도 역시 우리나라의 외세항쟁사적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김일우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은 "고려의 대몽항쟁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그 마지막 정치세력은 제주의 삼별초였다"며 "끈질긴 항쟁은 끝내 몽골로부터 고려왕조의 존속이라는 양보를 끌어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현재의 역사로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소장은 "삼별초의 최종 종착지가 제주였다는 것은 국사에서 빼트릴 수 없는 외세항쟁사에서 제주 지역을 도저히 빼놓을 수 없게 하는 일"이라며 "이는 제주에서 일어났던 일이 처음으로 국사와 직결, 그것도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김 소장은 "오늘날 제주사회 원형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주 삼별초의 몰락이 계기로 작용했다"며 "이는 몽골의 제주경영이 이뤄지면서 몽골의 목축기술이 제주로 유입돼 제주의 방식과 결합한 뒤, 제주의 말 산업이 크게 확대되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이다"고 피력했다.

김 소장은 "그 결과 반농반어로 먹고 살았던 도민들은 반농반목의 생계도 가능해졌고, 상당수 몽골족의 유입으로 제주여성의 배우자도 훨씬 많아졌다"며 "이로써 제주의 경제력 확대와 인구 증가, 마을 확대 등의 제주사회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획물은 지역신물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취재팀=김대생 부국장 대우 교육체육부장, 고미 부국장 대우 문화부장, 김지석 정치부 차장, 한지형 사회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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