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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연재 잊혀져가는 항몽 유적을 찾아서
기획/ 진도, 삼별초군의 대몽항쟁 근거지4.또 하나의 고려 정부 수립 '진도'
김지석 기자
입력 2018-07-22 (일) 16:23:27 | 승인 2018-07-22 (일) 16:37:00 | 최종수정 2018-07-22 (일) 16:37:00
진도 남도진성.

반몽파인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건 친몽파 무신들이었다. 김준 등은 60년간 이어진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수장 최의를 죽이고 몽골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추진한다. 

1259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 강화가 성립됐다.

이후 무신 세력 간에 환도 찬반문제를 놓고 친몽파와 반몽파 간 또다시 세력다툼이 벌어지면서 죽고 죽이는 상황이 이어진다. 

결국 무신 임유무와 문신 송송례, 홍문계의 싸움에서 임유무가 죽으면서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 같은 무신정권의 몰락은 왕정 복구와 개경 환도를 동시에 가져왔다. 

△ 최정예부대 '삼별초' 항쟁의 시작
1270년 고려는 39년 만에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환도를 단행한다. 

하지만 개경환도에 불만을 품은 최정예부대 삼별초가 깃발을 높이 올리고 몽골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을 결의한다.  

강화천도 때부터 몽골과의 전투 최전선에 있었던 삼별초군은 고려정부가 환도를 결정하자 친몽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것을 천명한다.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은 개경환도와 함께 삼별초 해체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운다. 

"개경환도를 단행한 고려정부는 진정한 고려인들이 아니다. 고려의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으며 고려의 국왕은 승화후 온님이시다. 자 모두 나를 따르라"는 배중손 장군의 말에 백성과 군사들이 모여들었고, 그렇게 1270년 6월3일 1000여척의 배가 강화도를 떠났다.

△ 진도에 새로운 고려 왕국 건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강화도를 떠난 배중손 장군을 필두로 한 삼별초는 진도를 근거지로 택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은 것은 육지와 가까우면서도 유사시에 쉽게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어 대몽항쟁에 매우 유리한 데다 진도에는 울돌목이라는 거센 물살이 흐르는 해협이 있어 수전에 약한 몽골군이 쉽게 침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 달 간 망망대해를 항해한 삼별초는 진도 북동쪽 벽파 진으로 들어와 용장사에 진지를 구축하고 둘레 13㎞의 용장산성을 쌓았다. 

성안엔 궁궐과 관아건물을 지어 전시수도의 모습을 갖추고 몽골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로써 고려에서는 몽골에 항복한 원종의 개경정부와 이에 반발하며 무인정권의 반몽책을 계승하는 삼별초의 진도정부로 두 개의 정부가 대립하게 됐다.

△진도를 거점으로 한 해상왕국 구축 및 함락

삼별초는 진도를 거점으로 한 해상왕국을 구축하고자 했다. 

바다싸움에 능하고 사기도 높은 삼별초는 남해안 일대를 공략해가기 시작했다. 삼별초는 1단계로 전라도 연해와 주요 고을을 장악했다. 장흥·보성·나주·전주를 점령해 무기와 곡식을 확보했다. 2단계로 제주도 관군을 물리쳐 제주도를 후방기지로 삼았다. 3단계로 경상도로 진출해 남해를 거점으로 삼아 경상 남부지역을 장악해 남부 연안지역에서 개경을 잇는 교통로를 마비시키는 한편 일본과의 연합을 꾀했다. 

다급해진 고려왕실과 몽골은 합세해 진도를 공격했지만 여러 차례 실패하자 1271년 5월 15일 왕실로 소환시켰던 김방경을 복귀 시키고 홍다구와 흔도를 앞세워 진도의 용장산성으로 총공격했다.

400여척의 전선에 타고 온 여몽연합군의 병력은 1만 명이 넘었다. 여몽연합군은 세 방향으로 군사를 움직여 삼별초를 공격했다.

삼별초는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결국 용장성이 무너졌다. 배중손은 남도포로 퇴각했다. 김통정은 왕을 호위해 의신포(금갑포)로 후퇴했다. 남도포로 물러선 배중손 부대는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전멸된다.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됐던 승화후 온 역시 홍다구 몽골군에게 사로잡혀 참살됐다. 

결국 진도는 이들 연합군에게 함락됐고 삼별초는 새로운 퇴로를 찾아 제주로 향했다.

진도 용장성.

△치열했던 대몽 항전 유적
삼별초가 처음 진도에 뿌리를 내린 용장성을 포함해 남쪽의 남도진성과 서쪽의 금갑진은 삼별초와 여몽연합군의 치열했던 항전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용장성은 명량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며 성 길이는 13㎞에 이른다.
용장산 능선을 따라 계단식 축대를 쌓고 건물을 배치했다. 

삼별초가 들어온 1270년에서 1271년 사이 10개월 정도 궁성으로 사용했지만 개성의 만월대나 강화도의 고령궁지 못지않은 위용을 드러냈던 고려궁지다.

남도진성은 앞산과 질매봉, 천둥산으로 둘러싸여 왜구의 침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남도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거북 모양으로 생긴 남도진성은 둘레가 610m에 불과하지만 동쪽에 있는 금갑포와 함께 명량해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새였으며, 특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삼별초 문화콘텐츠 가치 재발견 필요"

윤용혁 교수.

[인터뷰] 윤용혁 공주대 교수

"삼별초의 문화콘텐츠 가치는 굉장히 크며 이를 재발견해 우리시대에 필요한 인물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는 "그동안 삼별초와 관련해 국가사적 또는 정치사적 관점에 그치면서 민족주의만 주목받고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은 저평가된 경향이 있다"며 "삼별초의 민족주의를 넘어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삼별초 재발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삼별초는 박정희 정권 때 '민족'이라는 이름을 업고 성역화로 추진되다보니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며 "이제는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국제화 흐름에 맞는 시각과 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해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삼별초를 반란군 또는 몽골 항쟁의 중심으로만 보는 한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중립적 요소를 찾아야 한다"며 "특히 삼별초 역사성에 대한 극적인 스토리를 활용해 지역과 연계한 인물 등을 발굴하는 등 문화적 자원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강화도-진도-제주도 등 지역에서 바라보는 삼별초는 다 다르다"며 "삼별초를 매개로 지방자치단체 간 협력 구조를 강화하고 삼별초와 몽골이 지역에 전한 문화적 요소 등을 조사하고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삼별초 문화네트워크를 형성해 역사성, 관광자원, 지역 발전 여건 등을 잘 살펴 상호 발전을 도모해야 하며 강화도와 진도, 제주도의 삼별초 유적을 연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고 말했다.

김지석 기자  kjs@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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