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데는 자신 있었던 때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늘 학교가 멀었다. 한 시간여를 걸어야 학교에 도착하는데도 학교 가는 길이 신났다.  집보다 학교가 좋았나보다. 학교가 좋았다기보다 오가는 길에 심심찮은 놀거리, 먹을거리가 있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배고픔이 일상인 시절이었지만 산과 들에는 먹을거리들이 풍성했다. 여름에는 더욱 그랬다. 볼레낭에 달린 빨간 열매는 임자없는 먹을거리여서 등하굣길에 좋은 간식거리가 되어주었다.

아이들은 새들처럼 가장 맛있는 열매를 달고 있는 볼레낭을 귀신처럼 알아내어 한창일 때는 한 나무에 대여섯은 붙어 있던적도 있다. 다 따먹었다고 생각해도 다음 날이면 붉은 열매가 가득했다. 나중에 부처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득도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부처님은 이 열매를 먹으면서 수행을 했구나'하는 순진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저러나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걷는 일이 참 힘겹게 느껴지는 요즘이어서 그렇다. 

만해축전에 참여했다가 산책겸 백담사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백담사 가는 길 입구까지다. 40여분을 걸었던 것 같다. 땀이 등허리를 적시고, 앞서 걷는 사람에게 '나는 포기하고 싶다'고 말할 뻔 했다.

뙤약볕에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힘이 들 줄이야. 속도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걷자.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와볼 것인가. 설악산 자락의 십이선녀탕 계곡에 흐르는 물에파란하늘이 내려앉았다.

가로수로 심어진 산초나무의 빨간열매가 송이송이 붉에 타오르고 있었다. 성냥불을 그으면 '퍼퍽'하고 폭죽이 터질 것만 같다. 간밤에 요란하게 터지던 폭죽소리가 산초열매의 화신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산 아래 나물 밭에 허수아비가 서 있다. 자세히 보니 이빨 빠진 허수아비다. 새들도 보이지 않는다. 딱히 지킬 것도 없는 산나물 밭이다. 새를 쫓기 위해서 허수아비가 서 있다는 말은 옛말이다. 요즘 허수아비는 오가는 이들의 눈요깃거리이다. 그래서 패셔니스트 허수아비가 많다. 벙거지 모자에 롱티셔츠, 허리춤에는 소고도 매달았다. 발 아래는 곰취나물, 곤드래, 수리취, 오가피나무도 보인다. 제주의 지슬이 어려운 시절 구황식물이었다면 강원도의 구황식물은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이제는 웰빙식단에 없어서는 안될 귀한 것들이지만 말이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면서 농작물에 대한 가치와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아직도 귀에 쟁쟁한 '조팝'이란 것이 밥상의 중심에 있었던 때가 있었다. 조밥 한양푼이 밥상 위에 올라서기가 무섭게 4남매가 동시에 달아붙어 한입 더 먹어보겠다고 아귀다툼 하던 그 시절. '곤밥'을 먹을 수 있는 제삿날이 얼마나 기다려졌든지.

"가난한 집에 제사는무사 영 많은지..."라고 푸념하던 어머니의 한숨이 얼마나 애석하게 들리던지. 이제 곤밥은 조밥이나 보리밥에 밀려 그리 환영받지는 못한다. 보리, 콩, 조 등이 더 귀한 작물이 된 것이다. 이렇듯 농작물에 대한 가치와 평가는 달라지고 있는데 여전히 달라지고 있지 않은 건 농민들에 대한 대접이 아닐까. 

폭염 아래 타들어가는 건 농작물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가슴도 다 말라붙고 있다는 보도가 심신찮게 들린다. 연일 폭염으로 고추·콩·고구마 등의 밭작물의 잎은 누렇거나 벌겋게 말라죽고 있단다. 이대로라면 다 갈아엎어야 할 판인데, 한 해 농사가 이렇게 끝나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평생 논밭에서 굴러 옹이처럼 둥그러진 몸들이 막물가지 빛깔처럼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아닌게아니라 마을앞 정자나무 아래 노인 몇이 둘러 앉아 막걸리 사발 부딪치며 푸념 섞인 한숨들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 거칠지는 않지만 모질게 내뱉는 말들, 언뜻 듣기로는 이렇게 들린다.

"뒈짐 뒈졌지. 이렇게는 못살기래요."라고. 그 속을 누가 알랴. 유일하게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앞 산 계곡 바위 틈에 겨우 버티고 있는 나무들이지 않을까. 허연 뿌리가 다 보이도록 그들은 칠전팔기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푹푹 찌는 폭염에도 간간히 바람을 실어나르면서 발 아래 개울에 제 얼굴들을 씻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도 저무는 오후이면 그 개울에 발을 담그고 손을 씻을 것이다. 나무 뿌리처럼 얽히고 설킨 그들의 낯과 손을 어루만지며 고단한 삶을 위로할 것이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시구들 사이사이 노인의 낯빛, 나무의 허연 뿌리, 사운거리는 개울물의 몽돌들, 저 멀리 계곡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정적을 깨는 오토바이 소리. 삐리리리..., 퀵서비스로 짜장면이 계곡 아래로 배달된다. 산골 마을 계곡에도 짜장면이 배달된다니 세상 많이 편해졌다. 순전히 휴양객의 입장에서 그렇다. 산골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소란스러운 일인가.

안그래도 속시끄러운 판에 누구는 몰놀이한답시고 계곡 아래 텐트를 치고 놀면서 짜장면 배달을 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오토바이가 옥수수밭 가에 세워지고 배달원이 짜장면 통을 들고 옥수수밭 가를 지난 계곡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어쩐지 아슬아슬하다. 이러다 저 노인네들, 한소리 할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느덜 멕일라구 옥쌔기 갈았나?" 런닝셔츠 바람의 노인이 손을 내저으며 일어선다. 배달원이 연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스물이나 되었을까? 이러나저러나 다들 사는 게 힘겹다. 

헐떡거리며 걷다보니 백담사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한 차로 가야하기에 약속 시간에 늦으면 안된다. 마음 같으면 백담사 계곡물에 발도 담가보고 싶고, 내친김에 오세암까지 들러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걷는 데도 한계에 부딪쳤다. 백담사 입구까지도 겨우 왔다. 덕분에 마을 구경, 사람 구경, 농심 구경, 산 구경을 한 셈이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버스를타고 내려오는데 자꾸만 현기증이 났다. 곡예운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갑작스런 걷기로 진이 빠진 탓이다. 또 버스가 고개를 돌 때마다 누군가 걸었을 무수한 고갯길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해 한용운도 '이 길을, 아무도 걷지 않은 이 길을 걸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구토증이 올라왔다. 산을 넘고, 바위를 넘고, 또 산을 넘고, 눈밭을 구르고, 가시밭길에 채이며 그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산나물 사이에 해당화가 수줍게 피었더니만, 그의 시처럼 묻는다.

"당신의 꿈은 언제 피었나요?",  "나의 꿈은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그려." 알다가도 모를 대답이다. 둘도 되고 셋도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여행은 내 안의 내가 둘도 되고 셋도 되는 그런 일 아닐까? 시가 그렇듯이. 시만 그런가? 삶이 그렇듯이. 둘도 되고 셋도 되고, 그것 참 별스럽다.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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