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삼별초에 얽힌 많은 설화

삼별초 군사들은 세계 강대국인 몽골군에 끝가지 항쟁해 고려 무인의 드높은 기상과 호국결의를 보여줬다. 사진은 항파두리에 위치한 항몽순의비에 견학온 유치원생들 모습.

일찍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대부분 정복한 몽골(원나라)은 고종 18년(1231)부터 30년간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해 왔다.

이에 고려조정은 강화도를 임시왕도로 하고 몽골을 상대로 저항했지만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끝까지 고려를 지키고자 대몽항전을 결의했다.

진도에 이어 제주도로 퇴각해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최후의 1인까지 대몽항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원종 14년(1273) 여몽연합군의 총공격을 받고 모두 섬멸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당시 세계 강대국이었던 몽골과 맞서 끝까지 항쟁을 벌인 삼별초에 얽힌 많은 설화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 홍다구의 복수로 최후 맞은 승화우 온왕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왕무덤재에 삼별초 온왕의 무덤으로 전하는 유적이 있다. 

진도 삼별초의 임금 승화후 온은 현종의 8대손으로 홍복원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영녕공 준의 형으로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에게 참살당했다.

영녕공 준과 온왕을 참살한 홍다구는 서로 풀 수 없는 오랜 원한을 가진 사이다. 준은 1241년(고종 27) 고종의 아들로 위장, 몽골에 입조해 몽골 황족의 여성과 혼인했다.

준은 1258년 홍복원이 총관으로 있던 요양에서 홍복원과 갈등을 일으켜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아들 홍다구도 이때 심한 고초를 겪었다. 홍다구는 그 원한을 두 번에 걸쳐 보복했다.

준은 1263년 심양지역의 고려인을 관할하는 군민총관에 각각 임명됐지만 이때 홍다구의 참소로 준은 관직을 박탈당했다. 다시 10년 세월이 흘러 1271년 홍다구는 진도에서 준의 형의 목숨을 겨누고 추격했다. 준은 아들 옹과 희를 전투에 참가토록 해 홍다구의 칼날에서 형을 구하려고 했지만 홍다구의 복수의 칼날을 막을 수 없었다.

△ 지렁이와 정을 통해 낳은 아이
제주지역에는 진도에서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로 온 김통정 장군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우선 김통정 장군에 대한 설화는 출생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강화도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밤마다 한 남자가 몰래 들어와 잠을 자고 갔다. 

어느날부터 과부의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그것을 눈치 채고 남편도 없는 사람이 저럴 수 있느냐고 수군거렸다.

과부는 동네사람들에게 사정을 털어놓자 사람들은 그 남자가 찾아오면 실로 그 몸을 묶어두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과부는 동네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남자의 허리에 몰래 실을 묶어 두었다.

다음날 아침 실을 따라가자 실이 커다란 지렁이 허리에 감겨져 있었다. 과부는 오늘밤도 징그러운 지렁이가 다시 찾아오면 어쩌나 생각하고 그 지렁이를 죽였다.

그 후 과부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나고 겨드랑이에는 자그마한 날개가 돋은 아이를 낳았다. 동네사람들은 아이를 지렁이와 정을 통해 낳았다고 해 '지렁이 진'자 성을 붙이고 '진통정'이라 불렀다. 이 아이가 바로 김통정(金通精)인데 성이 김씨로 된 것은 김씨 가문에서 '진'과 '김'이 비슷하다 해서 김씨로 바꿔 놓았다고 전해진다.

△삼별초 우두머리가 된 김통정

김통정 장군이 여몽연합군에 대비해 쌓았던 항파두리성 성터.

김통정은 자라면서 활을 잘 쏘고 하늘을 날며 도술을 부렸다. 그래서 삼별초의 우두머리가 되어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들어왔는데 그가 들어온 곳은 군(軍)이 입항했다 해서 '군항이(동귀리 포구)'라고 부른다.

김통정 장군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받되 돈, 쌀을 받지 않고 반드시 재 닷 되와 빗자루 하나씩을 받았다. 이 재와 빗자루를 비축해 두었다가 토성 위를 빙 둘러가며 재를 뿌렸다.

김통정은 외적이 수평선 쪽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말꼬리에 빗자루를 달아매어 채찍을 놓고 성 위를 돌았다. 그러면 안개가 보얗게 피어올라 적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곤 했다. 

△'아기업개 말도 들어야 한다'
어느 해 김방경 장군이 거느리는 고려군이 김통정을 잡으러 왔다. 김방경 장군도 도술이 능해 전세는 위태로웠다.

김통정 장군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사람들을 성 안에 들여놓고 성의 철문을 잠갔다. 이때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아기업개(아기를 돌보는 사람) 한 사람을 그만 들여놓지 못했다. 이것이 실수였다.

김방경 장군은 토성이 너무 높고 철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이때 군졸이 어린 여자아이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아이는 김통정 장군의 아기업개였다.
아기업개가 "저 쇠문 아래 풀무를 걸어 놓고 열나흘만 불을 때 보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

아기업개 말에 김방경 장군은 곧 풀무를 걸어 놓고 불을 때기 시작했다. 열나흘이 되어가니 철문이 벌겋게 달아올라 녹아 무너졌다. 

이래서 아랫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의 '아기업개 말도 들어야 한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한낱 아기업개를 소홀히 여긴 탓에 삼별초는 이 전투에서 패배라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죽으면서도 백성에게 샘물을 선물
성문을 무너뜨리고 김방경 장군의 군사가 몰려들자 김통정 장군은 깔고 앉았던 쇠방석을 바다 위에 내던지더니 날개를 벌려 쇠방석 위로 날아가 앉았다.

김방경이 다시 아기업개에게 묘책을 묻자 "하나는 새로 변하고 또 하나는 모기로 변하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새로 변한 고려군들이 김통정 장군의 머리 위를 어지럽게 날자 김통정 장군은 비통한 마음에 '이 새는 나를 살리려는 새냐? 죽이려는 새냐?'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젖히고 새를 보았다. 그 순간 목의 비늘에 틈이 생겼다. 모기로 변한 고려군 장수는 이 틈을 노려 장군의 목을 베었다.

이때 김통정 장군은 죽어가면서 '내 백성일랑 물이나 먹고 살아라'하며 홰(靴)를 신은 발로 바위를 꽝 찍었다. 바위에 신발 자국이 움푹 패고 거기에서 샘물이 솟아올랐다. 이 샘물을 '횃부리', '횃자국물'이라 한다. 

△지역 곳곳에 남아 있는 삼별초의 흔적
김방경 장군이 김통정 장군의 아이를 임신한 김통정 장군의 부인을 죽이니, 매 새끼 아홉 마리가 죽어 떨어졌다. 김 장군의 부인이 죽으면서 흘린 피는 일대의 오름을 적셨는데 지금도 흙이 붉어 '붉은 오름'이라 불린다.

이외에도 성밖 서민 및 병사들의 음료수로 사용했다는 '구시물'과 김통정 장군과 귀족계급들이 음료수로 사용했던 샘물인 '옹성물', 극락봉에서 삼별초군이 궁술연마시 표적으로 사용했던 대형암석 '살맞은 돌' 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견훤과 아기장수 그리고 김통정 장군
사람이 아닌 다른 이류(異類)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범인과는 다른 특별한 외모를 지니고 태어나거나, 후에 건국하는 등 영웅적인 위업을 보여준다. 

김통정 장군의 출생 과정은 백제를 건국한 견훤과 비슷하다. 견훤의 어머니도 지렁이와 교류해서 견훤을 낳았다. 

김통정 장군의 생긴 모습은 민중들이 희망이었던 아기장수의 모습과 비슷하다. 아기장수 또한 비범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지만 부모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김통정 장군의 설화는 견훤과 아기장수 이야기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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