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에필로그

삼별초는 거대한 제국 원을 맞아 고려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로운 투쟁이었다. 원나라를 상대로 임시왕조를 세워가면서까지 투쟁했던 민족은 고려인들이 유일하다.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외세에 맞서 40여 년 동안 항쟁했던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우리가 잘 기념하고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다.
△끝나지 않은 전쟁 50년 몽골 전란
삼별초의 패망이 곧 제주에서의 전란의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273년 삼별초의 패망에 이어 제주에 대한 지배권은 몽골에 넘겨졌다.
몽골은 탐라국초토사라는 관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탐라국초토사는 1275년(충렬왕 원년) 탐라총관부로 개변하고 다루가치를 보내 그 지배를 강화했다. 초토사가 군사적 성격이 강한 관부라고 한다면 총관부는 민사적 성격이 강한 지배기구라 할 수 있다. 제주도는 대체로 1305년(충렬왕 31)까지 몽골에 의해 직접 지배됐다.
삼별초 3년 정도의 기간에 비하면 이는 그 10배 정도의 기간이다.
여몽군의 제주도 점령은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전선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1274년 여몽연합군의 후쿠오카 상륙, 그리고 1281년 항복한 남송의 군대까지 동원한 13만 병력에 의한 일본에 대한 2차 공격 시도로 이어졌고 이 전쟁에 동원된 고려민의 어려움과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4·3으로 이어진 또 다른 비극의 근원
몽골의 문화는 이미 제주 문화형성에 중요한 하나의 줄기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바로 이 같은 역사는 또 다른 비극의 근원이 됐다.
제주 토착사회에 뿌리를 내린 몽골의 잔류세력이 구축한 지배 체제가 고려의 중앙 권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삼별초 패망이후 100년 뒤인 1374년 최영 장군에 의한 제주 군사 작전이다.
목호를 정벌하기 위해 동원된 군사 규모는 상상이상이다. 군선이 314척, 군대가 무려 2만5605명이었다. 삼별초 진압을 위해 제주에 파견된 여몽군의 규모가 군선 160척, 병력 1만2000이었던 것에 비하면 목호를 겨냥해 동원된 병력의 규모는 그 2배에 달한다.
1273년 제주에서 삼별초가 진압될 때 토착민과 외래 유입집단이 구별되지 않고 피해를 입은데 이어 100년 후에도 묵호세력과 토착민의 관계가 구별되지 않으면서 제주도는 100년 전 삼별초 진압작전 때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함께 이 사건은 차이점은 있지만 600년 후 4·3에서 제주도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 역사적 상흔의 선례가 됐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몽골의 공세에 끝까지 저항했던 오랜 고투의 여정
삼별초를 반몽 항전의 민족적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역사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정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삼별초에 대한 비판 역시 다른 반쪽의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은 이를 바라보는 그 시대의 관점이 작용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상반하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삼별초는 여전히 삼별초다.
13세기 무인정권하 몽골 침입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고려 자주성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 나름의 생존을 끝까지 추구하다 무너졌던 한 집단의 역사다.
13세기에 밀어닥친 몽골의 거대한 파도를 막아내기에 삼별초의 방어력은 애초부터 역부족이었지만 몽골의 파상적 공세에 끝까지 저항했던 가장 강력한 저항집단으로서의 오랜 고투의 여정만은 있었던 사실 그대로 기억돼야 한다.
△대몽항쟁의 상징적 유적 삼별초
개경에서 강화도, 그리고 멀리 남쪽 진도를 거쳐 바다 끝 제주에 이르러서야 막을 내린 44년 삼별초의 여정은 그에 대한 역사적 가치 평가 이전에 사건 그 자체로서 이미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삼별초는 고려의 몽골에 대한 장기 항전의 배후가 됐고 이에 의해 고려는 몽골과의 지루한 외교적 담판을 통해 고려 왕조의 왕통과 최소한의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조선이 개국하는 1392년까지 고려는 그 찬란한 역사를 이어갔다.
일본은 삼별초 정부와의 연대에 무관심했지만 사실은 가장 큰 수혜자였다. 삼별초의 항전이 없었다면 일본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삼별초 관련 유적은 13세기의 치열했던 대몽항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삼별초는 관련 유적은 역사적 의미만이 아니라 성곽과 건물 터, 도자기, 기와, 무기 등 구체적 자료가 있고 연대가 분명하기 때문에 삼별초의 유적은 보존돼야 한다.
이와 함께 삼별초 핵심 인물의 부각과 활용도 중요하다.
문헌과 구전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제주도의 김통정은 삼별초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주 지역역사의 핵심인물이다. 김통정을 구심점으로 설정한 기존 자료의 재구성, 동상제작 등 김통정을 영웅으로 부각하는 것이 탐라문화권 개발이라는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 글로컬 역사 콘텐츠 활용 방안 모색
삼별초에 대한 가치 평가는 지역에 따른 격차가 있을 수도 있다.
민족 가치를 넘어서서 국제화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에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만큼 삼별초는 가치 평가의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삼별초는 종래의 민족주의 관점의 가치에서 벗어나 국제화와 지역을 강조하는 글로컬 콘텐츠로서의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특히 삼별초의 정체성을 재정리하고 이를 국제적 관점 그리고 지역과 연관한 글로컬 역사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진도·강화 지역 네트워크 강화 필요
삼별초를 매개로 한 지자체간 협력구조를 강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삼별초 콘텐츠의 장점은 지방자치단체 간 혹은 국제적 연대 강화에 유리한 역사 소재다.
제주도와 진도군, 강화군 지역 네트워크를 강화함으로써 삼별초는 어느 역사 콘텐츠보다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더욱이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북한의 개성을 비롯해 후쿠오카, 오키나와, 닝보 등의 일본, 몽골, 중국까지도 연결할 수 있다. 삼별초는 지방자치단체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콘텐츠다.

△2019년·2020년 삼별초 콘텐츠 활용 기회
특히 몽골의 고려와의 첫 접촉에 의해 형성된 이른바 여·몽간의 형제맹약이 1219년에 맺어졌다. 이에 2019년은 한몽 교류 800주년이 된다.
그리고 2020년은 삼별초의 봉기 750년이 되는 해다. 이러한 계기를 활용해 제주·진도·강화 등 삼별초 유적이 있는 곳에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삼별초 콘텐츠 활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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