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제주항일독립운동사 3. 조천만세운동

조천 출신 김장환 독립선언서 갖고 귀향하면서 구체화
1919년 3월 21일 독립선언서 낭독…4일 연속 만세운동
4차 시위 1500여명 동참…학생운동·사회단체 조직 영향 

제주지역 3·1운동은 제주의 관문인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에 걸쳐 전개됐다. 이 시기는 전국적으로 3·1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시기로 서울 휘문고보 4학년인 조천 출신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구체화 됐다. 제주지역 3·1운동은 민족교육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주는가 하면 각종 사회단체가 만들어지는 등 많은 영향을 주게 됐다는 평가다. 
 
시위운동 거사 결의

제주도가 지난 1996년 12월 발간한 「제주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제주 조천지역에 항일운동이 고조돼 나가고 있던 상황에 직접적인 도화선을 제공한 이는 김장환이다. 김장환은 3·1운동의 선창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김시학의 아들이자 김시범·김시은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김장환은 경성에서 3·1만세 시위에 가담해 활동을 전개하다 1919년 3월 5일 이후 시위자 색출작업이 강화되자 3월 12일 제주 귀향을 결심했다. 

그는 3월 15일 목포를 거쳐 16일 조천에 도착했다. 이때 김장환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제주에 들어왔는데, 인사차 숙부 김시범을 찾아간 그는 서울의 시위상황을 소상히 말했다. 

김시범·김시은은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제주지역에서 시위운동을 결심하게 된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3월 17일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 발의를 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들의 동지 규합은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됐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이들은 거사일을 3월 21일로 정했다. 대부분 지방에서 장날을 이용해 3·1운동을 진행한 것과 달리 도내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을 택했다. 

4일간 만세행진 전개

조천읍 3·1운동은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차례 연속적으로 전개됐다. 

3월 21일 아침 조천리 미밋동산에 김시범·김시은·고재륜·김형범·김연배·황진식·김용찬·백응선·김장환·박두규·이문천·김희수·김경희·김필원 등 14명을 비롯해 김순탁·김시희·김백능·부병각·김종호·한석영·한석화·심동인·한백흥 등 모두 23명의 거사 동지, 그리고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서당생도 등 150여명이 모였다.

14명의 동지중 한명인 김필원은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제주경찰서 조천지서 서쪽 미밋동산으로 향했고, 행진을 본 주민 500여명이 동참했다. 오후 3시 시위대는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성내까지 시위행진을 강행했으나 신촌리에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 충돌로 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김시범과 김시은 등 13명이 연행됐다. 

3월 22일에는 조천리 장터에서 백은선·박두규 등의 주도하에 200여명이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를 진행했다. 

시위대는 신촌리를 향해 행진했으나 시위를 주도했던 박두규와 김필원 등이 치안방해를 이유로 연행되면서 해산하게 됐다. 

3월 23일에는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3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이문천은 100여명을 이끌고 함덕리로 시위행진을 강행했고, 시위대가 함덕리에 이르자 800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시위운동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3차 시위로 이문천과 백응선 등 8명이 일제 경찰에 연행됐다. 

4차 만세운동은 3월 24일 조천 오일장 날을 기해 일어났다. 이날은 김연배를 중심으로 1500여명이 시위에 가담해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장을 보러 나온 부녀자들도 상당수 합세했다. 

하지만 김연배 등 시위를 주도하던 4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됐다. 

제주지역 계몽운동 확산

조천만세운동은 신촌·함덕·신흥 등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산남 지역인 서귀포 등지로도 확산됐다. 

특히 제주지역에 민족교육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3·1운동 이후 제주청년들은 문맹퇴치 및 계몽운동 차원에서 각 지역별로 야학운동을 전개했다. 연경야학회, 노동야학회, 상도야학회, 북촌부녀야학회 등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조천만세운동은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주게 됐다. 3·1운동 계승 차원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지역적 단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제주출신 유학생들과 밀접한 연계를 맺으면서 전국적인 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성격을 가지게 됐다. 

또 제주지역에서 각종 사회단체가 조직되고 활동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1923년 9월 제주청년연합회가 창립했고, 1928년 제주청년동맹이 결성됐다. 

이를 통해 청년단체 운동이 1920∼1930년대 제주지역 항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인터뷰] 한길헌 조천청년회의소 회장 

"독립열사의 숭고한 민족혼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겠다"

한길헌 조천청년회의소 회장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제주3대 항쟁인 조천만세운동, 무오법정사 승려항쟁, 구좌 해녀항쟁을 재현하는 퍼포먼스 등을 계획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또 "유관순 열사를 모티브로 한 연극공연 등도 준비중"이라며 "조천만세운동 최초 거사동지 23인의 넋을 기리는 기념수로 동백나무 23그루를 심고 기념비를 세워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한 회장은 "조천만세운동은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서귀포 등지로 확산됐고 제주지역에서 전개된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의 모태가 돼 제주에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독립열사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조천만세운동 최초 거사동지인 김시범 선생의 일가는 8명이나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99년이 지난 지난해가 돼서야 서훈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선열들의 숭고한 민족혼을 계승하고자 하는 청년단체나 후손에게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라며 "최초 거사동지 14인중 김용찬 선생은 아직도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조천만세운동의 불씨를 서울에서 제주로 옮긴 김장환 선생마저 여전히 독립유공자 인정과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어 정부와 제주도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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