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제주항일독립운동사 4. 해녀항쟁

출가 해녀 노동력 착취당하자 1920년 4월 조합 창립
조합 변질로 시위…연인원 1만7000여명 238회 전개

우리나라 최대 어민항쟁 기록…추가 연구·조사 과제

일제는 1876년 이후 한반도의 경제적 침탈과 더불어 제주도에 대한 어업 수탈을 자행했다. 잠수기업을 동원해 도내 어장 전복과 해삼류를 남획해 갔고 그로 인해 제주도 어장은 황폐화 됐다.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됐으나 어용조합으로 변질되면서 해녀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됐다. 어족 자원과 노동력 착취 등을 일삼는 일제에 맞선 생존권 투쟁이었다. 해녀항쟁은 제주의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으로 꼽히고 있다.

△해녀조합 정식 설립

제주도가 지난 1996년 12월 발간한 「제주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1890년대 이후 일본의 어업 침탈로 도내 어장이 황폐화되고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많은 해녀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출가 노동에 나서게 됐다.

제주해녀들의 출가는 1895년 경상남도 지역에 진출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북부지역, 일본, 대련, 청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넓혀 갔다.

1920년대 2500여명이던 출가 해녀는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400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출가 해녀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제주해녀들은 1913년부터 출가 지역 어업조합에 입어료를 내고 채취활동을 했으며, 임시 점포를 설치한 객주에게 해조류를 팔았지만 객주들이 근수나 가격을 속이는 일이 허다했다.

객주들이 일본 상인과 결탁해 해녀들의 채취물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인이 세운 해조회사에 넘기는 구조였다.

또 해녀들이 어선을 이용하기 위해 거간료까지 지불해야 하는 등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 유지인 김태호 등은 1919년 10월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조직했고, 1920년 4월 16일 정식으로 조합을 창립했다.

해녀조합은 해녀가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판매하거나 중개 역할을 하며, 자금도 융통해주기 위해 설립됐다.

△생존권 침해 집단 저항

이처럼 해녀조합이 설립됐지만 1930년대 들어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겸직하면서 점차 변질됐다.

제주도사는 해녀들의 고통과 분쟁을 해결해줘야 함에도 오히려 일본인 상인과 결탁해 해녀들의 이권은 물론 생존권까지 침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1930년과 1931년 성산포와 하도리에서 조합이 경매가격을 하향 책정하는 횡포가 발생하자 1931년 6월 해녀들은 공동 투쟁을 모색하게 됐다.

또 1932년 1월 구좌면 일대에 해녀들이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도사에게 제출했다. 해녀들이 출가증명서 없이 육지로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일본인에게 수의계약 우선권을 주지 말하는 내용 등이다.

또 도사는 해녀조합장으로 해녀 권익옹호 및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어 조합장직 사임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하도리 해녀들은 1932년 1월 7일 세화리 해녀들과 합세해 장터까지 시위행진을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해산됐다.

이어 1월 12일에는 구좌면과 성산면 해녀 1000여명이 해녀복 차림으로 세화리와 하도리 사이에 집결, 초도 순시차 방문하는 신임도사의 차량을 포위하며 반발했다.

이로 인해 부춘화·김옥련 등 해녀 20여명이 검거되자 해녀 500여명이 1월 24일 동료를 구하기 위해 세화주재소로 찾아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해녀들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1월 26일과 27일에도 시위를 벌였지만 일제에 의해 진압됐고, 많은 해녀들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해녀항쟁 연구·조명 절실

해녀항쟁은 1930년대 국내에서 보기 드문 항일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이어진 시위에 참가한 해녀는 연인원 1만7130명에 달하며,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도 238회나 됐다.

특히 해녀항쟁은 여성 집단에서 주도한 대규모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일제의 수탈에 맞서 여성들이 생존권을 위해 집단 투쟁을 벌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어민항쟁이자 제주의 3대 항일운동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해녀항쟁에 대한 연구와 자료는 부족한 실정이다. 생존권을 지키고자 일제의 수탈에 맞선 해녀들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통한 항일운동사 조명이 요구되고 있다. <끝> 

홍충희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문화유산과장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해녀항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전국에 방영해나갈 계획이다"

홍충희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문화유산과장은 "제주해녀항일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해나갈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홍 과장은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2년 구좌지역을 중심으로 해녀들이 인간 존엄성과 생존권 수호를 위해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 저항했던 유일한 여성 중심의 항일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일제는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어 해녀협회를 창립했으나 머지않아 착취와 수탈을 본격적으로 자행하면서 해녀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밝혔다. 

홍 과장은 "이러한 제주해녀들의 기개와 그들만의 독특한 공동체 정신은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는 근간이 됐다고 할 수 있다"며 "도에서는 제주해녀 항일정신을 후손들에게 기리기 위해 매년 추념행사와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해녀항일운동 주역 3인에 대한 흉상건립과 항일운동 당시 해녀들이 저항했던 역사현장에 표지석을 설치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제주해녀항일노래도 만들었다"며 "이 노래는 일제 당시 야학을 통해 해녀들에게 신지식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다 투옥된 강관순 선생이 옥중에서 쓴 제주해녀항일노래 가사를 작곡가 최인양 선생의 작곡으로 만들어 올해 처음 기념식장에서 제창하게 됐다"고 말했다. 

홍 과장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추가 조사는 물론 다양한 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해 항일운동의 이론적 논리를 정립하고 교육을 실시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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