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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꽃이 들려주는 목소리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입력 2019-04-29 (월) 16:10:12 | 승인 2019-04-29 (월) 16:12:20 | 최종수정 2019-04-29 (월) 16:12:17

요즘은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얘길 듣고부터이다. 나이가 들수록 여기저기 잦은 병치레는 예견된 것이지만 실제가 되고나니 괜스레 마음이 무겁고 죄스러운 마음이 크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의사에 말에 귀 기울이는 일 정도가 고작이다. 

병원 대기실에 어머니와 함께 앉았는데, 어머니는 자꾸 손을 만지작거린다. 불안하신 모양이다. 어머니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어머니 손을 잡아본다. 차갑고 깡마르다. 이 손을 평생 놀리셨으니 몸이 성할 리 없다. 어머니는 마른 꽃 그 자체다. 

마른꽃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이래저래 축할 받을 일이 있을 때 받은 꽃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버릴까 하다가 그때 그 추억이 생각나 다시 화병에 꽂아두었다. 장미는 다 말라 검어지고 안개꽃만 무성하다. 어떤 꽃이든 주변을 화사하게 만들어주는 안개꽃. 안개꽃 꽃말을 찾아보니 간절한 마음이라 적혀 있다. 지금 내게 간절한 마음은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환한 유리창 속 화병에 마른 안개꽃 한 다발 깊은 신음처럼 꽂혀있다 붙잡을 새도 없이 저 여인  어두운 저녁의 길을 밝히며 별처럼 핀 적 있었으리라 목숨 하루 넘기는 것이 피말리는 나날이어서 갸냘픈 몸매와 수척한 얼굴의 삶을 강물에 흘러보냈어도 곧은 마음 잃지 않고 어느 먼 이국의 사막처럼  정갈하게 말라버린 어머니 몸을 움츠린 채 잠들어 있다  꽃병에서 살며시 들어내니 모래 아래 묻힌 묘실이 열리고 석관 위에 바짝 마른 꽃, 가까이 지켜온 생사가  어둠 깊은 곳에 잠겨있다 잎맥을 사포로 문질러  물기를 빼내야 했던 꽃처럼  어머니, 제몸의 피를 다 주시고 얼마나 목마르셨을까 말라비틀어진 몸을 돌아눕히니  핏물 자국이 짙게 드러난다 흰머리카락만 남겨 놓고 마른 안개꽃, 어머니 (김종제 시, 「마른 꽃, 어머니」)

어머니는 1942년생이시다. 여섯 살 때 4·3사건을 겪으셨다. 집이 다 불타버리고 연이은 할머니를 비롯한 연이은 가족의 죽음으로 고아가 돼버렸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인지 여전히 여섯 살 그 마음일 때가 있다. 아무도 보호해줄 사람 없는 고아의 마음. 이제는 가족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병원에 모시고 가기 전까지 전전긍긍하면서 데리러 오고 있냐를 연신 물으신다. 어떨 땐 귀찮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가만 계시면 모시러 갈 것을 왜 그렇게  걱정 하냐고 물으면 "누굴 믿어?"라며 오히려 나무라신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는 그 마음은 아마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태어나자마자 방구석에 방치되었다고 한다. 연이어 낳은 딸이라는 이유로 모친이 죽든지 살든지 젖을 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 기억이 없지만 큰 이모가 목격한 것을 말해서 알고 있다고 하신다. 그 얘길 두고두고 하신다. 어떻게 태어난 아기를 그렇게 내버려둘 수 있냐고. 지금 시절이라면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의해 처벌을 받을 사항이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은 그런 일들이 잦았다. 딸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방임 또는 유기와 같은 외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평생을 안고 산다고 한다. 갖은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타인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 그 대표적이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오롯이 자신을 안아주고 먹여주고 사랑해 줄 대상과 접촉하면서 애착형성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러지 못할 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론으로는 알겠는데 실제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답답하다. 말을 들어도 꼭 고아서 듣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뭔가 있을 거야' 또는 '말은 저래도 속마음은 아닐 거야'는 등의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레이'는 가스펠과 블루스의 마왕 레이 찰스의 이야기를 다룬 전기영화다. 레이가 겪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서사는 흘러간다. 레이(제이미 폭스 분)는 어린 시절, 동생 조지를 빨래통에서 익사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끊임없이 동생의 죽음이 환영처럼 따라다니고 끝내는 시력을 잃게 된다. 또한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제 철저히 혼자라는 지독한 외로움은 그를 마약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목사의 딸 델라(케리 워싱턴 분)와 결혼했지만 마약의 습관은 사랑마저도 외면하게 만든다. 급기야 검찰에 검거되는 파문을 일으킨다. 하지만 자신의 통제되지 못한 삶이 주변을 괴롭히고 가족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레이는 유일하게 자신을 지탱해준 음악으로부터 다시 회생을 꿈을 불태운다.

이것이 영혼의 음성을 가진 가스펠과 블루스의  마왕 레이 찰스의 인생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가슴을 울리는 장면은 어머니가 전해준 음성이다. "약속해주렴. 누구도 널 굴복시키지 않게 하겠다고. 네가 스스로 당당히 살아가겠다고." 역시나 어머니는 위대하다. 어느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그를 살린 건 결국 어머니의 음성이었으니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목말하는 것이 아닐는지. 나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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