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형 투자유치 공존과 성장 모델 찾는다 1. 제주투자의 역사

제주에 외국인이 투숙할 호텔이 없자 재일제주인인 김펑전이 투자해 1963 현대식 시설을 갖춘 제주 관광호텔을 지었다. 사진은 1963년 개관한 제주의 첫 관광호텔인 제주관광호텔 개장식. ('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공)

해방이후 제주 가내수공업 중심 머물러 토착자본 경제성장 한계
고 맥그린치 신부 한림 중산간 황무지 다져 제주 양돈업 기틀 마련
재일제주인 등 해외동포 자금 송금과 기증 관광 농업 등 산업화 이뤄

△제주경제는 투자유치의 역사

제주도는 지역내에 대기업 또는 대규모 자본가가 없었기에 제주경제의 기틀을 다지고, 성장하는데 외부투자유치가 절대적 기여를 했다. 해방이후에 제주경제는 선교사의 선도활동과 재일제주인 등 제외동포들의 송금과 기부로 조금씩 성장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80~90년대 제주경제는 관광객 증가 등으로 활기를 띄었지만 2000년대 들어 제주관광산업이 정체를 보이는 등 위기에 놓였다. 결국 제주경제가 지속성장을 위해 새로운 투자유치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자본과 사람의 왕래가 자유로운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출범한 것이다.

이후 해외투자가 활발히 이뤄졌고 2010년대 중순 일본·중국 등에서 많은 투자가 이뤄지며 2010년부터 2017년 제주경제가 활황세를 보였다.

최근 들어 제주방문 관광객이 1500만명을 넘고, 경제활동인구 증가와 대규모사업 등으로 난개발에 중국자본 잠식 논란까지 커졌다.

도민사회에는 투자유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뒷전으로 밀리고 해외투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늘었다.

이로 인해 투자유치가 위축되면서 지난해부터 제주경제가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결국 활로를 찾기 위해 새로운 투자유치정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동안 투자유치에 있어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도민들은 당시 투자유치를 위한 긴박했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 과거사례를 교훈으로 삼고, 투자기업과 도민사회가 함께 공존·성장하는 방향으로 제주형 투자유치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제주경제 근간 재일제주인 투자

해방 직후 제주도는 한국전쟁과 4·3사건으로 인해 제주경제기반은 전무했다. 산업화를 위한 경제자원은 거의 없었다. 당시 경제활동은 자급자족을 위한 농축수산업이 전부였다.

특히 제주도가 산업화를 이루며 현대경제개념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했지만 도내에는 대규모 기업이나 자본가가 거의 없었다.

해방이후 1990년대까지 제주경제는 재일제주인의 투자와 기부금을 바탕으로 기틀을 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일제주인 김평전이 1963년 제주에 외국인이 투숙할 호텔이 없자 당시 3000만원으로 현대식 시설을 갖춘 제주관광호텔을 지었다. 이후 서귀포에 허니문하우스와 서귀포관광호텔이 건립되며 제주관광은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주팔레스호텔과 제주컨트리클럽, 핀크스골프클럽 등 1990년대 초까지 특급호텔과 골프장은 재일제주인의 투자로 조성된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지방자치시대가 돌입하면서 도지사와 시장들이 일본을 방문해 재일제주인의 자본유치에 힘을 기울였다. 실례로 제주마이스산업 성장 기반이 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의 경우 재일제주인 55명이 도민주로 참여하며 77억원을 투자했다.

재일제주인들은 일본서 감귤묘목을 구입해 제주에 기증했고, 제주 1차산업의 핵심인 감귤산업을 육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재일제주인 기업인들이 재정적 지원은 물론 기술, 노하우를 전수해 줬다.

이처럼 재일제주인들의 기증과 투자활동은 관광과 금융, 농수축산업까지 제주지역의 눈부실만한 경제발전을 달성하는데 절대적인 공헌했다.

하지만 재일제주인의 기부와 투자는 지역경제와 사회발전에 크게 공헌했지만 그만큼의 대우와 보상을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2세와 3세 등의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들어 재일제주인의 제주투자는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제주인들이 지속적으로 제주에 투자를 하고, 과거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수익과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책과 전략을 마련, 건전한 투자유치관계를 지속시켜야 한다. 

△양돈·목축업 산업화 기반
제주도 목축업과 양돈업의 기반도 일반투자와 목적과 형식을 달랐지만 외부투자와 지원으로 인해 다졌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90세를 일기로 선종한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가 60여년전 제주4·3과 한국전쟁으로 경제적 파탄을 겪은 제주에서 목축업과 양돈업의 기반을 다지고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는 등 지역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었다.

축산업 기반을 다지고 농업기술을 전파한 고 맥그리치 신부는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 4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제주 한림본당에 부임, 제주와의 인연을 맺었다.
그가 제주에 도착할 당시 제주는 가난에 허덕이고, 경제를 육성시킬 기반 조차 없는 등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는 도민들이 자립할 수 있고, 지역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양돈산업을 추진했다. 당시 도민들은 돼지를 변소에 키우며 자가소비용으로 사육했기 때문에 양돈산업에 대한 경제적 개념도 없었다.

그는 인천에서 새끼를 밴 요크셔 돼지 한 마리를 구입해 한림까지 가져왔고, 훗날 연간 돼지 3만 마리를 생산하는 동양 최대 양돈농장의 기초이자 제주 근대 목축업의 기반이 된 것이다.
4-H 클럽을 조직하고 가축은행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축산업을 시작했고, 1961년 축산업 교육과 실습 등을 목적으로 성이시돌 목장(성이시돌 중앙실습목장)을 만들었다.

농민들에게 사료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사료공장도 설립했고, 1300여명의 여성을 고용하는 한림수직도 설립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1962년에 제주에 최초이자 전국에서도 7번째로 신용협동조합(한림신협) 을 설립하는 등 지역금융의 기반도 다졌다.

당시 제주사회가 맥그린치 신부를 외부인 그리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그가 추진하던 사업과 활동을 거부했다면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대의 양돈산업메카로 성장하지 못했거나 발전속도가 매우 늦어졌을 것이다. 김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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