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설 명절은 처음인가 싶을 정도로 날씨가 어리둥절하다. 느닷없는 '우한 폐렴' 소식은 모처럼의 나들이마저 조심스럽게 한다. 그럼에도 연휴를 맞아 제주여행을 택한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명절음식을 몽땅 넣고 잡탕을 끓여먹는 것도 지겨워 가까운 해안가 나들이를 하는데 비속의 수선화가 탐스럽다. 여느 해보다 일찍 핀 수선화가 기름내에 절은 속을 시원스레 뚫어준다. 수선화는 겨울이 제멋이지만 제철답지 않은 날씨에도 그윽한 수선화향기는 바닷바람에 실려 연휴 내내 들끓은 이의 마음을 담담하게 해준다. 꽃 선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한 적 없는데, 그래도 받고 싶은 꽃 선물이 있다면 수선화 한 아름이다. 방안에 꽂아두면 왠지 묵은 때는 절로 사라지고 뭔가 새로 시작하고픈 마음이 들게 하는 꽃이 수선화이다. 

어머니는 겨울마다 수선화를 한 아름 꺾어 오신다 
사투리로밖에 말할 줄 모르는 내 고향 처녀 같은 
들꽃 가난한 친구들에게 한 다발씩 보낸다 한 송이 
마다 한 번씩 아픈 허리 구부린 내 어머니의 수고를 
그들이 알 리 없건만 마음 빈자의 제단에서 기름도 
없이 타오르는 향기로운 불꽃 되기를 기도하는 내 
마음 그들이 알 리 없건만 그래도 다시 겨울 오면 
수선화꽃 나누어주고 싶어라 (김순이, 「제주수선화 2」전문)

올해도 어김없이 세배행사가 있었다. 매해마다 내가 속해 있는 여성단체에서는 선배 댁을 찾아 공동세배를 한다. 하얀 봉투에 넣은 세뱃돈을 받는 행운을 아직 누리고 있다. 선배는 빳빳한 새 돈을 미리 찾아놓았다가 하얀 봉투에 세뱃돈을 넣어 준다. 나는 매해마다 받은 이 돈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나눠주며 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싶어서이다. 시에서 "빈자의 제단에서 기름도 없이 타오르는 향기로운 불꽃"처럼 강렬하게 한 해 동안 나를 지탱하는 제단을 마련해 둔 셈이다.

연휴동안 그리스 태생의 스웨덴 작가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다시 쓸 수 있을까』를 읽었다.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는 작가의 고백이 그 어느 때보다 공감된다. 글을 쓴다는 것이 부끄러움의 치적을 두텁게 쌓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책임이 하나 더 느는 나이가 되었다는 깨달음의 결과라고나 할까. 여기서 책임이라고 할 때, 누군가를 먹여살려야하는 경제적 책임과는 무관하다. 어쩌면 말의 책임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요즘은 말하는 게 두렵다. 말을 하려면 뭘 알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따지고 보면 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는 것 같은 나를 보는 것이다. 이를 테면 "수선화 향기가 그윽하다" 또는 "진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돌이켜보면, 나는 수선화를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나르키소스,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 시 등을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백과사전 속의 수선화일 뿐이다. 내가 몸으로 느낀 수선화는 아닌 것이다. 이제껏 내가 뽐내면서 말하곤 했던 모든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은 교과서나 사전 속에서 얻는 것들이 태반이다. 부끄러움과 허무감이 밀려온다.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뉴스를 맹신하기도, 부정하기도 자신 없어진다. 무슨 말을 해도 공기가 빠져나간 풍선 같은 느낌이다. 적어도 말은 "압축된 공기"일 때 힘을 발휘하는데 말이다.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는 다시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선택했다. 그는 스톡홀름 집필실을서 벗어나 아내의 집으로, 여름 별장으로, 트위터로, 그리고 고향 그리스로 떠난다. 결국, 여행자로서 기억을 더듬으며 깨달은 것은 평생 이민자로서의 삶을 통해 자아분열상태가 최극단에 이르렀다는 자각이다. 그것을 해결해준 것은 다름 아닌 모국어였다. 모국어를 되찾음으로써 "나는 점차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77세에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쓴다는 것에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구체적인 현실을 맞닥뜨리는 것이 아닐까. 내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것이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 그 끝을 추적하다보면 내 삶의 뿌리에 당도하지 않을까. 아무리 향수를 뿌리더라도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있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는 삶의 자장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네 막내 다송이가 한 말, "냄새가 똑같아."가 이를 대변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은 골든 글러브를 비롯해 전미 비평가협회 뉴욕 비평가협회, 시카고 비평가협회 및 LA 비평가협회, 토론토 영화 비평가협회와 밴쿠버 영화비평가협회가 수여한 작품상과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기세를 몰아 정치권에서도 올해 4월 총선에 맞춰 '기생충' 공약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훤히 보인다. 지하방에 살아가는 일가족이 범죄의 온상이 되게 방조한 건 빈익빈부익부로 대변되는 양극화 현상이 빚어낸 슬픔이다. '와이파이', '학력위조', '대만카스텔라', '치킨집', '대리운전', '고액과외', '미술치료' 등 우리사회가 경제적ㆍ정신적으로 얼마나 병들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현상들이 영화의 곳곳에서 썩은 내를 풍기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사람이 사는 처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브랜드 마크였다. '나이키', '조다쉬'니 하는 마크가 찍힌 신발을 신거나 옷을 입어야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눈가림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나이코'니 '아섹스'니 하는 짝퉁이 오일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이 또한 저작권법이 만들어지기 이전 현상이다. 저작권법이 만들어지면서는 더욱 진화된 지능범죄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화적으로 말하면, 지하방에서, PC방에서 각종 위조법과 해커기술이 실습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범죄영화가 뜨는 건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권력의 부패와 분배의 불공정이 잠재적 범죄의 씨앗을 땅 속 깊이 뿌리내리게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거부하려는 다수의 대중이 있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붉은 와인 맛에 취한 이들이다. 사람이 지하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냄새를 맡지 못한다. 아이들만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영화가 현실이 되고 있다. 한강에서 괴물이 밀려오듯이 썩은 내가 온 사회를 덮칠 때면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수선화 향기를 잠시 잊고,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추적해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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