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관음사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데 눈발이 간간이 날린다. 눈 구경하기 어려운 겨울이라 그런지 가볍게 흩날리는 눈발마저 반갑다. 주변 나무숲에 눈이 설핏 쌓이긴 해도 제대로 눈을 만끽하기엔 역부족이다. 노루들이 산 아래로 내려와 차도로 뛰어들어 멈칫 놀라게 한다. 노루는 흘깃흘깃 몸을 돌려 숲 속으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어쩌면 사람보다 노루가 더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소리는 사람이 지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몸에 새겨진 공포는 순식간에 파르르 떨면서 소리를 내지르게 된다. 뱀을 보았을 때의 공포는 말해서 뭐하랴.  

진눈개비 오려는지 다리 아픈 겨울밤에 다 를 버리고 기어 다니는 뱀이 가여웠다/왼쪽이 퇴화한 뱀, 너무 길고 길어서/징그러운 뱀의/잘록한 간과 콩팥/아예 버린 왼쪽 폐가 안쓰러웠다/진눈개비 쏟아져 날 궂으려는지 삭신이 쑤셔서 잠들지/못하는 겨울 밤/그리움에 허기져서/늘 헤매어 다니는/내 슬픈 다리를 근심하였다/아니, 1억 3천만 년 전에 팔과/다리를 버리고 땅 속으로 들어간 뱀이 /가난한 이 땅 위로 올라오는 이유를 근심하였다/진눈개비 오려는지 다리 아픈 겨울밤에 다리를 버리고/기어 다니는 뱀이 그리웠다/죽은 남편이 자꾸만 지하실에/나타나서 이사를 가 버린 이웃집 여자처럼 (이원구, 「겨울 뱀에 대한 추억」)

겨울에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 나와 있으면 불안하다. "죽은 남편이 자꾸만 나타나서 이사를 가버린 이웃집처럼" 불안하다. 한밤에 느닷없이 이삿짐을 싸는 이를 바라볼 때, 왠지 불안하다. 딱히 야반도주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디론가 급하게 떠난다는 건 뭔가 위협적이거나 불안한 상황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 유목민이었던 시절의 기억들이 몸에 새겨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디선가 불현 듯 맹수들이 나타날까봐 노심초사하던 시절의 인류는 불안을 달고 살았을 것이다. 덕분에 청각이 엄청 발달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로 누구의 발자국인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했으니까.  

오랜만에 온몸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겟 아웃'이다. 영화 초입에 사슴 로드킬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크리스'(다니엘 칼루야)가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암스)'의 부모님 집으로 가던 길에 사슴을 치고 만다. 뭔가 불길하다. 로즈의 부모님 집에서는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현장을 찾은 경찰은 운전도 하지 않은 '크리스'에게 신분증을 요구한다. 이 영화의 핵심키워드인 흑인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편견어린 공포의 시선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내내 귀를 찌르는 듯한 현악기 소리와 찻잔 부딪치는 소리 등이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들린다. 소름이 돋는다. 사건을 수습하고 파티에 참여한 크리스는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파티는 열리고, 다양한 백인들이 손님으로 찾아오는데 그 중에 6개월 전 실종된 흑인 '안드레'를 보게 된다. 이 흑인은 로즈의 남동생에 의해 6개월 전 납치되었고, 파티에 나타난 그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로즈의 집에서는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파티 내내 연출된다. 그것은 음악과 흑백 사진 등과 같은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다. 사실 크리스는 사슴을 치게 되면서 11살에 뺑소니차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무의식에 있던 기억이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떠올리게 된 것이다. 

무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경험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키워드가 된다. 지금의 감정, 느낌의 정체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크리스도 뭔가 모를 분위기로 감도는 정체를 알아차리려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현재 그를 압박하는 스트레스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때론 위험에 예민하게 대처하도록 돕기도 한다. 과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2의 공포, 죽음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주인공 크리스를 살렸다. 무수무시한 공포의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다. 

길에 나온 뱀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 일이 다시 떠오른다. 한여름의 아파트 단지에서의 일이다. 2m 길이의 뱀이 아파트 단지를 유유히 기어갔다.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거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남자 두엇이 삽을 들고 나오더니 나무가 있는 곳으로 뱀을 유도하고는 삽으로 목을 치는듯했다. 차마 그 장면을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돌려 멀리 걸어갔다.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뙤약볕에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뱀의 운명, 뱀이 어쩌지도 않았는데 목을 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공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목숨가진 생명들은 다 살자고 거리로 나오는 것인데, 어느 날, 느닷없이 당하는 '로드킬'은 모든 것을 허망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생명을 틔울 약간의 기운마저 있다면 땅 밖으로, 거리로 나가야 한다니 생이 때로는 잔인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코스모스가 벌써 피어 한들거린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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