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동, 시간을 모아 자산으로 1. 설촌

의식주 공유에서 공동체·관심사로 마을 개념 확장
원도심에서 중산간까지…제주 사회 변화 흐름 품어
오라호의 기억, 한천·병문천·토천 따라 생활사 축적

제주의 삶에는 특별한 코드가 있다. 공동체와 생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문화·역사다. 혼자 반듯한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대 지탱하고, 머물기 보다 행동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람 인(人)을 닮았다. 압축-근대화와 농어촌과 원도심 공동화 등에 휘둘리며 잊고 있었던 것들이 중요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의 색깔보다는 제주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스펙트럼으로 오라동은 중요한 시·공간적 의미를 갖는다. 제주도 의뢰로 제주대학교 휴먼인터페이스미디어센터가 축적한 '오라동'은 가치, 공감, 향유, 행복이라는 세대간 연결고리로 요약된다. 문화자산이란 이름으로 살핀 오라동을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오라동 전경. (제주대학교 제공)
오라동 전경. (제주대학교 제공)

△ 기억을 이어 보물로

지난 2013년 서울특별시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오늘, 우리는 100년 후 보물을 준비합니다'였다. '서울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가치가 있는 자산을 발굴해 보전하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프로젝트지만 접근 방법은 달랐다. 마을의 특별함이 아니라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의 범주 안에서 다음에 전하기 위해 가치가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래야 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제시했다.

그 안에는 산업단지나 시장, 마을과 골목, 경관처럼 문화적 인공물이나 문화적 행위가 이뤄지는 물리적 배경을 포함했다. 서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변화무쌍하고 그 속도 역시 빠르며 정통이나 전통이란 단어에 취약한 구조라는 점을 감안할 때 서울이어서 가장 힘든 일이었고 절실했을지 모른다.

살펴보면 '마을'의 의미도 시간에 따라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의식주를 해결하는 공간, 그리고 지역공동체로 동질성을 형성하는 범주로 해석한다. 구성원 간의 특별한 관계가 행정 구역이 아닌 마을을 만드는 사례도 있다.

도시계획이란 딱딱한 껍질 하나를 벗겨내면 제주의 마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문화 공간이다. 지역 정체성이 특이성이 되고, 다시 경쟁력과 지속가능한 장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격하거나 더디거나

번화했거나 번화한의 기준으로 오라동은 앞 순위에 오른 적이 별로 없다. 오라동은 인구이동과 인구구조의 변화를 통해 3개 법정동(오라1동, 오라2동, 오라3동)으로 정리된다.

동쪽인 이도동과 아라동, 서쪽은 연동, 남쪽은 한라산 국립공원, 북쪽은 용담동과 접하는 지리적 위치를 갖는다. 바다를 끼고 있지는 않지만 도시화라는 사회 현상을 품은 마을로 특별함을 갖는다. 원도심에 위치하면서 농촌의 풍경과 주요 시설의 이전·신축 등 도시 개발 바람을 비교적 격하게 탔다. 반대로 사라지거나 소멸할 기회도 더뎠다.

오라동은 과거 고지래에서 오호촌 또는 월라촌이라 불렸다. '오라'라는 이름은 1914년 이후 불렸다. 하지만 1702년 제작된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중 <비양방록> 편에 '오라호(五羅好)'라는 지명이 등장한 것을 보면 이미 마을에서 불리던 이름이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또 하나 마을 유래를 살필 수 있는 기준은 '하천'이다. 오라동은 한라산에서 발원한 한천·병문천·토천이 관통하는 지점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며 마을을 이뤘다. 용천수 등 생활용수를 중심으로 했던 마을들과는 다른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자연 공생 민속지식 축적

오라동 주민들은 하천에 의지했고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자연·사회적 변화 속에 생존했다. 변화무쌍한 '내창'의 흐름 속에 공동체 지혜를 모으고 수많은 경험을 축적하며 민속지식을 만들었다. 하천 양쪽을 연결한 다리는 생활반경의 확장이자 이웃의 발견, 외부 세계와의 교류와 소통을 의미한다.

법정동 별로도 차이가 있다. 오라1동은 1600년경 설촌역사를 지닌 모오마을과 1976년 새롭게 탄생한 공설마을로 구성된다.

오라2동은 한라산까지 뻗어있는 정실마을을 비롯해 4개 마을로 구성된 동으로 설촌 역사가 매우 깊다. 오라동 전체를 두고 볼 때 자연적·경관적·문화적 차원에서 자원들이 풍부한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정실마을의 역사는 14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가 깊다. 1600년경에는 정실마을과 이웃한 곳에 연미, 사평마을이 탄생해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의 전통이 계승됐다. 1982년 제주국제공항 제3차 확장공사(1979년)를 계기로 도두동(몰래물)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새로 동성마을을 이룬다.

오라3동은 속칭 '중댕이굴'이라 하는 월구(月龜)마을을 중심으로 설정했다.
 

[인터뷰]현호경 오라동장·이종실 방선문축제위원장

현호경 오라동장(오른쪽)과 이종실 방선문축제위원장.
현호경 오라동장(오른쪽)과 이종실 방선문축제위원장.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70여년 가까이 오라동에서 살아온 이종실 방선문축제위원장은 오라동에 관해 "가만히 있는데 도시가 내게로 왔다"고 말한다. 그만큼 급격한 개발과 발전이 있었단 소리다. 이어 "그럼에도 타 도심지와 비교했을 때 도로에 관한 여건은 미비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현호경 오라동장은 마을의 특성에 관해 "인구 1만5000여명 가운데 70~80% 가량이 제주로 유입돼 온 이주민이다"라고 설명하면서 두 사람 모두 "그렇기에 오라동이 가진 기존의 지역 문화유산에 관한 가치 보전이 쉽지 않은 실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은 오라동이 가진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방선문(訪仙門)을 꼽았다. 방선문은 제주시 오등동과 오라2동의 경계 지점인 한천의 기암절벽 바위로 신선이 드나들던 문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2호로 조선시대 제주를 대표하는 영주10경 가운데 하나인 영구춘화이자 고전문학인 배비장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현 동장은 "제주에 부임한 목사나 유배인 등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았고 그 흔적으로 그들이 바위나 절벽 기암에 오목새김한 글인 마애명 60여개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방선문 아래로 한천이 쭉 이어지는데 독특하게 다른 내천과 달리 물이 고이는 곳 등에 족감석, 창꼽소, 애기소, 깅이소 등의 이름이 붙어있다"며 "아마도 풍류를 즐기기 위해 방선문을 찾던 선비들이 길을 오르면서 만난 특별한 장소들에 이름을 붙인 게 아닐까 싶다"고 유래를 짚었다.

다음에 소개한 곳은 연미마을에 위치한 항일유적 조설대(朝雪臺)다.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를 품었는데, 1904년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비밀결사체인 '집의계'가 현무암 바위에 새긴 배경에 이 일대를 조설대라 부른다.

이 위원장은 "3·1운동보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보다 앞선 제주 최초의 항일운동 발상지나 마찬가지"라며 유산의 의미를 해설했다. 이어 현 동장이 "2013년부터 매년 12월 첫째 토요일에 이때의 뜻을 이어받기 위한 경모식이 열린다"고 덧붙였다.

4·3유적지로는 곳곳의 '잃어버린 마을'들을 소개했다. 23가구에 주민 90여명이 모여 살다 1949년 초 죽성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한날한시에 소각된 마을 '어우눌', 서북청년단과 경찰·군인들이 들이닥쳐 한라산에 올라간 사람들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소각된 마을 '선달뱅듸' 등의 옛터가 남아있다.

현 동장은 "서북·대동청년단 등에 의해 4·3 당시 최초의 방화가 발생한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연미마을이다"라며 "현재 발생지 일대에는 당시를 잊지 않기 위해 방화현장 상황도와 빗돌을 세우고 오라동4·3길로 조성했다"고 말했다.

오라동에 얽힌 문화유산들을 짚어보면서 이 위원장은 "현재 오라동 상황 속에서 문화유산이 원활히 보전되고, 계승되기 위해선 과거의 유산이 현재에 갖는 의미를 살려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유산이 가진 속뜻을 알기 쉽게 풀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 동장은 "제주에서, 특히 도심지에서 자연과 역사가 함께 어우러진 곳은 오라동만한 곳이 없다"며 "오라동 구석구석에 위치한 문화자원들을 발굴해 이를 잘 이으면 훌륭한 문화벨트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비췄다. 고미·김수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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