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쌀쌀한 감은 있어도 걷기에 좋은 날씨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귤밭 풍경도 곱고, 물때 맞춰 바다밭으로 뛰어드는 해녀들도 진풍경을 이룬다. 연이은 연휴를 마주하니 마치 설거지를 다하고 나서 '이제 뭐하지?'하는 기분이 되었다.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하다가 마침 취재할 일도 있어 바닷가 마을로 향한다.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해녀들이 바다 가운데서 한참 작업 중이다.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테왁과 가끔씩 들려오는 숨비소리, 길가에 대기하고 있는 오토바이가 주인의 거처를 알려준다. 그리고 주인을 놓친 듯 먼 바다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유아차 하나가 있다.
어렸을 때 도통 알 수 없는 말이 '물때'이다. '드는 물', '나는 물'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는 달력만 보고도 '열두물'이니 '열 세물'이니 하는 말을 되뇌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냥 느낌상 물에 들기 좋다거나 들어가서는 안 되는 시간 정도로 이해했다. 지금도 그 수준이다. 다만, 달이 차오르고 이울고를 반복하듯이 물때도 그처럼 순환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은 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말, 참 부담스러운 말이다. 조급증마저 불러일으킨다. 특히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 말이 그렇다. 때를 놓치면 인생 끝난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스무 살도 안 된 청소년들이 인생 종쳤다며 미리 서둘러 방어막을 친다. '×같은 세상 될 대로 되라지'라면서 말이다. 뭔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인생이 끝났다는 표정으로 침을 칙칙 뱉는 아이들을 보며 무슨 말이라고 걸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정거장 주변 뒷골목에서 서성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집에는 가야될 게 아니냐고 속없는 말을 자꾸 하고 싶어진다. 버스 떠난 지 오랜, 늦은 밤에 말이다. 아니, 너무 이른 아침인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로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 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들어선 안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얼마 전에 지수(가명)라는 중학생 아이를 만났다. 아침에야 잠이 들고 오후 늦게야 학교에 나오는 불량학생(?)이다. "어젯밤 뭐 했어?"라고 물었을 때, 지수는 "그냥 카톡"하면서 얘기해요. 친구랑, 아는 오빠랑, 또 친구랑…."이라고 대답했다. "밤새도록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라고 물었을 땐, "그냥 아무 얘기나 막해요."라고 대답했다. '왜'라는 질문에 '그냥'이라는 답이 자동이다. 그래도 괜찮다. 말이라도 하니까. 상담 장면에서 만난 아이들 거의 대부분은 말을 잘 안한다. 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왜 내가 너한테 말을 해?'라는 태도가 대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방적인 질문은 그들 표현대로라면 '꼰대 대마왕' 수준이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굿 윌 헌팅'에서 기억나는 대사는 "It's not your fault(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타인도 신뢰하지 못하는 윌(맷 데이먼 역)에게 상담교사 숀(로빈 윌리엄스 역)이 하는 말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어려서 받은 상처로 인해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사랑마저 고백하지 못하는 윌에게 상담교사는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믿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모든 반항의 기저에는 어떤 행동(사건)의 결과가 자신의 잘못이라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깔려 있게 마련이다. 부모가 싸우는 것도, 가난 한 것도, 성적이 안 좋은 것도 모두 내 탓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아이가 잘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장난감을 부수거나 물을 쏟는 잘못은 누구나 하는 실수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건 특정 과목만 가지고 하는 경쟁이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평가의 전제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쟁중심의 세상도 아이가 만든 것은 아니다. 가난이 죄가 되는 이데올로기도 아이가 만든 것은 아니다.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에 갇혀 사는 현실도 아이가 만든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에 던져져 서로 경쟁하라고, 이겨야만 산다고 채찍과 당근을 끊임없이 제공받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면서 말이다.
다 때가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당위와 필요 사이에서 선택적 자유가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패러디 하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도 있는 법이다. 너무 경직된 질서에 맞춰 '지금의 때'를 강조하다보면 마음의 흐름을 놓치고 점점 자신을 잃어갈지도 모른다. 자신을 잃었다가도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있으나 너무 아픈 상처는 돌아올 기력마저 잃게 할 수도 있으니 너무 '때'를 강요하진 말았으면. 그림책 속의 '검피 아저씨'처럼 말썽꾸러기 아이들에게 "다음에 또 오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와 사랑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나의 상처를 아이에게도 똑같이 물려주고 싶은가? 복수를 왜 아이들에게 하는가. 적은 딴 데 있는 데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