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 주는 남자]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신호대기 중이던 모든 차가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한 대의 차가 움직이지 않고 그냥 서 있다. 운전사가 소리친다.

'눈이 안 보여.' 세상이 온통 뿌옇게만 보인다. 그와 접촉한 사람들은 하나둘 전염병처럼 눈이 멀어져 간다. 아내도, 안과의사도, 경찰관도, 안과 병원 진료실에 대기 중이던 사람들도. 갑자기 세상에는 눈먼 자들로 넘쳐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도시 전체에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퍼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가진 본성인 윤리와 사랑, 공동체적 삶의 가치 등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확실하지 않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또한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작품 속의 인간들은 물질적 소유에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를 위해 자신의 인간성조차 잃어버린 장님이다. 눈먼 사람들은 수용소에 강제 격리된다. 그렇지만 수용소에 강제 격리되어서도 각자의 이익을 챙기기 바쁜 사람들, 이들에게 무차별하게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 전염을 막기 위해 수용 조치를 내린 냉소적인 정치인, 범죄 집단을 방불케 하는 폭도들이 등장한다. 

이 세상에는 눈먼 존재들뿐인지 모른다. 세상에는 물질적 소유에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소유를 위해서는 인간성조차도 쉽게 버리는 정신적인 장님으로 가득하다. '눈이 멀다'라는 사실을 단순한 물리적인 장애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장애로 표현해서 현대 사회의 윤리성과 정체성 상실을 꼬집어 내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작가는 무책임한 윤리의식과 붕괴된 가치관, 만연한 폭력을 정신적인 장님에 비유하여 격리된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이고 황폐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그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현대 사회와 인간의 어두운 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눈이 멀어 수용소에 갇히는 인물들의 일부는 함께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의지하며 도와가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이들을 통하여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 세상이 차츰 눈이 멀어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눈이 멀게 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생각해보면 끔찍한 일이다. 이 실명 현상이 전염병이 된다면 눈먼 사람들의 인권은 유린당하고 격리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또한 세상은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며, 인간의 문화도 예술도 과학도 소용없어지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품에서 도시의 모든 사람이 눈이 멀지만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작은 공동체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참사랑과 선한 인격으로 그들의 목숨을 구한다.

눈은 멀었지만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 볼 수는 있지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눈먼 영혼을 가진 자들로 세상은 이루어진다. 모두 아름답고 맑은 영혼의 눈을 뜨고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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