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이전 국내 최고 표고버섯 주산지로 명성
단순한 산림 자원 아닌 역사와 스토리 담겨 있어
대한민국 7호 국립공원 한라산은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자연의 보고이자 제주의 상징이다. 그러나 잊혀진 사실이 하나 있다. 한라산은 다양한 약초, 나물과 함께 '표고버섯'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 표고버섯 따러 가는 도민 왜 없을까
봄이면 수많은 인파가 고사리 꺾고 달래 캐러 다니는 것과 달리 "표고버섯 따러 간다"는 말은 들어볼 수 없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정해진 등반로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 표고버섯 주산지로 번성했던 재배산업도 이제는 간신히 명맥만 잇는 수준이 됐다.
하지만 옛 제주인들에게 한라산은 표고버섯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한라산의 오랜 역사와 전통 만큼이나 오랫동안 제주사람들의 삶과 이익을 공유해왔던 역사성을 갖는 산림자원이 바로 표고버섯이다.
너른 한라산 자락은 예로부터 제주 표고버섯이 자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고, 전국적으로 유명해 각종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스승인 이색의 시집 '목은시고'에는 "바다 멀리 제주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서한과 향이(표고버섯)을 책상 가득 쌓아놨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표고버섯은 당시에도 멀리서 온 귀한 선물이었다.
세종실록 1421년 기록에서는 '표고'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한다. 감귤, 유자, 동정귤, 청귤 등을 비롯해 표고버섯도 이전부터 제주에서 진상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또 조선의 미식가로 손꼽히는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표고는 제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고 기록했고, 이밖에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승정원일기, 각사등록 등에도 임금 진상품인 제주 표고버섯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던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옛 문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표고버섯과 우수한 품질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남아 있다. 한라산의 주요 산림자원이었던 표고버섯이 타 지역과 비교했을 때 특산품으로서의 가치와 위상이 대단히 높았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 재배 역사와 전통 살리는 방안 필요
제주 표고버섯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대량 재배 시대로 변화를 맞는다. 일본 자본가들이 한라산에서 표고버섯 대량 생산을 통해 무역을 활발히 했다.
일본인이 채취해 수출한 표고버섯은 1909년 625근을 시작으로 1911년 6000~7000근에서 1912년에는 1만근 이상이 될 것으로 당시에 예측했던 기록이 나온다. "한라산 일대가 모두 표고 밭으로 바뀐 느낌"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표고버섯 재배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강정효 사진작가에 따르면 1928년 이마무라 도모가 쓴 글에 방목중인 소가 재배지에 들어가 표고버섯을 먹어버렸다는 민원이 종종 발생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경찰서까지 가면 해당 소의 입 앞으로 생 표고를 내밀어 소가 먹으면 소 주인이 배상을 하고, 소가 먹지 않는다면 무죄로 추정했다고 한다.
표고버섯 재배에는 주로 서어나무와 참나무가 이용됐는데, 일제강점기 35년간 많은 나무가 벌채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1970년 국립공원 지정 이후 벌채가 금지된 이후에는 천혜의 버섯 재배환경 조건도 상실돼 제주 표고버섯 산업은 한순간에 몰락하게 됐다.
현재는 몇몇 농가만 옛 한라산 터전에서 표고버섯 재배 전통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고 해도 이에 대한 대비나 재배농가와의 적절한 협의가 이뤄져왔는지 고민해 볼 일이다.
제주 표고버섯은 산림자원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수많은 역사와 고난을 함께 해온 스토리를 갖고 있다. 때문에 전통과 역사를 기반으로 표고버섯 산업의 정체성을 지금이라도 다질 수 있다면 충분히 제주의 미래산업과 융합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김봉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