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5.부산 영도 해녀

부산박물관 특별기획전서 '새 삶터 개척' 의미 부여
'토착'해석 분분…출신지 더해 정착지 맞춘 접근 필요
희미해지는 연결고리, 문화 해석 공유 가치 확장해

부산박물관은 지난달 '부산, 관문 그리고 사람' 특별기획전을 마련했다. 오는 12월 5일까지 진행하는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특별기획전은 개기부터 현대까지 부산이 어떠한 관문을 거쳐 변천해왔는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부산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정체성과 현재의 위치를 살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우리나라 제2도시의 과거와 현재에 '해녀'가 등장한다.

△뭍으로 와 정착한 '부산' 해녀

부산에도 해녀가 있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는 '해녀가 부산에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한국의 해녀 역사와 더불어 전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해녀들의 어로법, 물질이 신석기 시대에 식량을 얻기 위해 행했을 자맥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명이다. 비슷한 내용을 일본 아마 홍보 자료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설명 중간에 현대 해녀라고 구분을 둔다. 해녀는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 연안에 모두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제주 출신이라는 점을 특징으로 봤다. 또 부산 해녀들이 도심 가까이에서 어로와 상거래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식민지 수산 경제의 확장과 더불어 제주 여성들이 한반도를 비롯해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로 이동하게 된 데 따른 결과로 설명했다.

부산박물관 기획전에서는 부산이 산업화의 중심지이자 확장된 삶의 무대를 만들게 된 배경 안에 해녀를 담았다.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한국전쟁 피란기부터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부산에서 새 삶터를 개척한 사람들의 영역이다. '제주도에서 뭍으로 와 정착한 부산 해녀'다.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2016년)와 문화재청 국가무형문화재 지정(2017년) 등의 과정을 살펴보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유네스코 등재 작업 때만 하더라도 지자체들의 관심이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등재 후는 사정이 달라졌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과정에서는 '왜 제주만'이란 견제도 있었다. 당시 문화재청은 '해녀가 한국의 전통적 해양문화와 어로문화를 대표해 시대적 변천을 넘어 오늘까지 그 명맥을 이어온 산 증인으로, 단순히 '물질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해녀와 관련된 기술, 지식, 의례 등의 문화를 통합한 의미'라고 지정 이유를 설명했다.
 
△산업화 속도 만큼 수 줄어

지난 2019년 11월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영도해녀문화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영도구는 부산시 남부에 위치한 자치구지만 섬이다. 우리나라 섬 단위 행정구역 중에서 유일한 구 단위 도시다. 우리나라 행정구역들 중 섬 단위 자지체는 총 10곳으로 제주특별자치도와 거제시를 제외하면 모두 군으로 분류돼 있다.

2021년 수산편람을 기준으로 부산에는 현재 684명의 해녀가 있다. 미신고자 141명을 포함하면 825명이 된다. 1년 전 847명에서 22명 정도가 줄었다.

신고자를 기준으로 기장군이 539명으로 가장 많은 해녀를 보유하고 있다. 영도구가 56명이다. 이전 자료 124명에서 절반 정도가 줄었다. 해운대구 역시 35명으로 이전 조사 81명과 차이가 컸다. 지자체가 나잠어업인 지원을 위해 파악한 숫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해녀 감소 속도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도시화와 산업화, 고령화 등으로 인해 해녀 수가 줄어들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면 대도시일수록 해녀가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없었음도 읽을 수 있다.

영도해녀전시관은 유네스코 등재와 관련해 해녀문화의 가치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제주와 연관성을 살필 수 있는 것으로는 전시관 앞에 설치된 제주해녀상과 제주해녀 자료사진, 제주출신 해녀들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이 있다.

해녀들의 탈의·휴식공간과 공동판매 등의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이지만 제주 외 지역에는 처음 만들어진 유형의 시설이지만 위치가 다소 외곽인데다 성격이 다소 모호한 배치가 신경쓰였다. 해녀들이 직접 작업을 하는 장소와 판매 공간이 떨어져 있어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었다. 전시공간 보다는 수산물 판매장 이미지가 먼저 와닿는 것이 문화적 접근을 차단하는 듯 느껴졌다.

△출향해녀 시작점 '1887년'
흥미로운 것도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껏 제주를 중심으로 봤던 해녀들의 이동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해방 이후 객주 모집으로 바다를 건넌 해녀들이 현지인과 결혼을 하거나 반대로 가족들을 부산으로 불러들여 자리를 잡았던 배경을 설명한다.

근대 이전 이동의 기준은 범선(돛배)다.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해안섬을 목적지로 정했을 거란 추정과 더불어 풍랑 등을 피해 섬에서 섬으로 이동했음을 살필 수 있게 했다.

이동수단 발달이 영도와 연결점을 만들었다. 돛배로는 최소 2주 정도 걸렸을 거리가 제주-부산 항로가 개척되면서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1887년 제주해녀가 '부산부 목도(영도)'에 간 것을 출향해녀의 시작점으로 정리했다.

제주 자료들의 시점은 그보다 조금 더 뒤로 간다. 여러 연구자들의 자료를 정리해 보면 부산항 개항으로부터 20여년 후인 1985년 부산부 목도에서 해녀가 목격됐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제주해녀들의 바깥물질이 1876년 당시 조선과 일본 간 강화도 조약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지역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줬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해녀의 이동은 먹고 살기 위한 이동(디아스포라.diaspora)이 아니라 자의적 선택에 의한 이동,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적 접근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특별취재팀=고미 방송미디어국장,김봉철 부장대우,이진서·김수환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해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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