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10. 통영 해녀

1997년 통영나잠제주부녀회 설립, 회관.해녀상 등 인정
75세 이상 승선 제한, 신규 가입 전무 계속해 수 감소
입어권 없이 선주와 1년 계약, 물 때 아닌 주의보 기준

종일 물질을 나간 해녀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이 포구로 돌아오는 해녀배를 맞고 있다.  취재팀
종일 물질을 나간 해녀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이 포구로 돌아오는 해녀배를 맞고 있다. 취재팀

"최근 몇 년 동안 바다에서 해녀를 많이 잃었어. 그래서 요왕굿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잘 안되네"
'사정이 있어 잠시 거제 바다에 다녀왔다'는 강옥란 ㈔통영나잠제주부녀회장(68)은 종일 물질에도 지친 기색 없이 취재팀을 맞아줬다. 나잠부녀회를 만들고, 해녀 탈의장을 짓고 했던 과정이 한편의 인생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그런 강회장이 요왕굿 얘기를 꺼냈다. 이 곳에서는 한 번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오랜 세월 이 곳에 터를 잡았지만 과거 배웠던, 살아가며 익혔던 것들의 회귀(回歸)다. 

△먹고 살 '일'을 찾아
통영나잠제주부녀회가 만들어진 배경을 알면 강 회장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20여 년 전 같이 작업을 하던 해녀 한 명이 바다에서 물숨을 먹고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엄마이자 가장을 잃은 가족을 지키고 보호할 장치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힘을 모아 같이 버텨야겠다는 마음에서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통영 미수동 지역을 중심으로 250여 명의 해녀가 통영나잠제주부녀회를 설립한 것이 1999년 7월이다. 현재 남아있는 해녀는 회비 납부를 기준으로 130명 남짓이다.

그동안 몸이 아프거나 나이가 들어서 바다를 떠나는 사람은 있어도 같이 해보겠다고 찾아오거나 하는 이는 없었다. 최고령은 올해 88세, 가장 나이가 어린 해녀는 56세로 30여 년의 차이가 있다.

통영 역시 일제 강점기부터 제주 해녀들의 이동이 잦았던 곳으로 꼽힌다. 기록을 보면 1920년대부터 통영 욕지도, 한산도, 사량도 등 육지에 딸린 섬에서 물질 작업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에는 배로 바깥물질 나가는 도중에, 또는 부산 영도에서 일할 자리를 찾아 옮긴 경우를 살필 수 있다.

고행섭 전 부산제주도민회 상임부회장의 기록 중에서도 '어머니가 한산도까지 가서 물질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이를 기준으로 어림잡아보면 1930~1940년대 어간이다. 강 회장은 18살까지 제주에서 물질을 하다가 결혼을 하면서 그만 뒀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 후 28살에 다시 해녀가 됐다.

△한달 6~8일 '휴무'
통영 해녀들의 작업은 이른 아침 시작된다. 행여 놓칠까 오전 7시 30분쯤 포구에 도착했다. 한때는 20여 척 이상 됐다는 해녀 배가 지금은 10척 남아있다. 배마다 사전 계약을 한 해녀들이 오른다. 해상사고 예방과 코로나19 방역 지침 등으로 신고 인원 이상은 승선이 어렵다고 했다. 우도 출신이라는 70대 선주의 도움으로 배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 작업 중 몸을 데울 수 있는 화로 같은 장치와 작업 중 잠시 몸을 쉴 수 있는 공간 등 해녀들의 하루를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대용량 뇌선에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투명 비닐에 든 간식 외에도 각자 작업 중 먹을 도시락을 챙겨왔다.

성산 신양리가 고향이라는 김순덕 해녀(70)의 빨간 도시락에는 삼다수와 두유, 귤 몇 개가 들어있다. 부산에서 살다가 통영 바다에서 자맥질을 한 것이 올해로 35년 정도 됐다고 했다.

우도 출신의 채영애 해녀(72)도 돈을 벌러 부산으로 갔다가 돌고 돌아 통영에 왔다. 17살부터 물질을 했다. 여수와 종포, 삼천포 바다에서 돈을 벌었다. 

배 지붕에 톳을 널어 말리느라 정신이 없던 오덕심 해녀(70)는 '대정 모슬포 출신'이라고 입을 뗐다. 낯선 취재팀이 불편할 만도 한데 '고향에서 왔다'한 마디에 목소리가 정겨워진다.

통영해녀들은 거의 종일 배에서 작업을 한다. 풍랑주의보 같이 작업이 어려운 상황만 아니면 바다에 간다. 7월부터 11월까지는 한달 8일 정도 쉰다. 12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는 매달 6일 정도가 쉬는 날이다.

△"물에 들어가면 전쟁이지"
마을어장 관리와 이용에 있어 책임의식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제주해녀와 달리 직업의 개념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어촌계에 가입되지 않아 작업강도나 권익 보호 등에 있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75세가 넘으면 자동 은퇴다. 안전상의 문제로 아예 배에 탈 수가 없다.

포항 등 경북 동해안 지역 해녀들은 마을 바다 작업을 하면서 어촌계에 일정 수준의 입어료를 내지만, 통영 해녀들은 선주가 계약한 어장에서 뱃물질을 한다. 매해 선주와 계약해 1년간 탈 배를 정하고 선주와 채취한 물건을 5대 5로 나눈다. 소라와 전복을 제외한 성게나 보말 같은 것은 해녀가 직접 거래한다. 뱃물질은 그래서 수협 위판 시간에 맞춰 진행된다. 연간 계약을 하다 보니 경북 등과 같은 '객지 물질'형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미수1.2동에 모여 살면서 마을 공동체간 유대감을 쌓고 있지만 제주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대신 공동체 규제를 요구하는 잠수회 대신 한 배를 타는 지역 출신 동료들과 친목을 도모하는 부녀회로 뭉쳐져 있다. "물에 들어가면 전쟁이지"라고 하면서도 길.흉사를 서로 살핀다. 특히 바다에서 테왁 주변으로 '머리가 올라오나 안 오나'를 끊임없이 살핀다. 

오전 9시 포구를 떠난 배들이 오후6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내를 기다린다는 말쑥한 양복의 신사가 "나도 우도 출신"이라고 말을 건넨다. 일찍 찾아온 찬 기운이 물가라 더 매서웠다. "뭐 하러 여태까지 기다렸냐"며 다시 배 안에 자리를 내준다. 몇 번인가 당일 잡은 성게알을 입에 밀어 넣다가 냉큼 옆에 앉아 작업을 도왔다.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몸을 데우고 내내 손질한 것들이다.

"돌아가면 우리 여기에 잘 있다고, 잘 살고 있다고 전해줘. 이왕 좀더 살펴줄 거면 제주에서 주는 오렌지색 테왁 보호망 같은 걸 지원해 주면 어떨까 싶어. 다들 잘 살아남아야지"

지역말이 조금 묻어나기는 해도 익숙한 제주어다. 웃으며 하는 얘기지만 그 속마음이 어떤지 아는 탓에 해녀 어머니들이 떠나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특별취재팀=고미 방송미디어국장,김봉철 부장대우,이진서·김수환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해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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