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11. 강원 해녀

제주도개세 '중국해까지 출가', 호동서락기 '맨발, 노랑머리'
지선 구분 모호, 1960~980년 미역 채취 '해녀사공' 활약
탈의장 등 편의시설 부족, 어촌 뉴딜사업 추진 관심 기대

제주 해녀들의 이동 경로가 어디까지 였을까. 이미 공개된 자료들도 있지만 제주연구원이 미국 하와이대학 해밀턴도서관에서 발굴(2018년)한 뒤 번역해 지난해 단행본(제주학연구총서 42)으로 공개한 「제주도개세, 濟州島ノ槪勢」에는 '해촌의 하류 부인은 나체로 바다에 잠수하여 전복, 소라를 잡고 해초를 따는 기능을 가지며, 일하는 모습이 감위민첩한 점과 체격의 이상한 발달상태를 보고 놀랄 것이다… 해녀는 자기 섬의 해안을 좁게 느껴서 경상남.북도에서 강원, 황해, 함경의 여러 도에서 지나해(중국해)까지 출가 물질을 나가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20년대 제주도를 관찰한 일본인들이 기술한 내용이지만 해녀들의 행적이 국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살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금메달 마라토너의 해녀 어머니
강원도에도 해녀가 있다. 일제강점기 제주해녀가 건너갔다는 내용 외에도 조선 여류 시인 김금원(1817~1851)의 '호동서락기'에 영동(강원도연해군)해녀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14살 나이에 남장을 하고 충청도와 금강산, 동해안 일대를 유람했던 1개월에 걸쳐 유람했던 김금원은 직접 본 해녀를 이렇게 기억했다. '영동해녀는 다 맨발에 노랑머리이다. 미역을 따서 업으로 하니라'. 시기를 봤을 때 출륙금지령을 피해 제주를 떠난 유민들이 이들 지역에 정착했는지, 지선해녀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남성들이 전복을 주로 잡는 '포작'이었고, 울산 이북 지역에서는 전복을 진상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여성이라고 분명히 기록한 점 등에서 강원 해녀의 시작점을 가늠할 수 있다.

이후 해녀는 대부분 제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이동한 경우로 설명할 수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의 어머니가 제주 출신 해녀(한림읍 협재리)인 것으로 알려지며 관심을 받았던 삼척의 경우 한참 미역 시세가 좋았던 1960~1980년대 초까지 제주 해녀들을 모집해서 미역을 채취했다.

미역 작업(4~6월)에 맞춰 해안마을 주민 2~4명이 제주도로 내려가서 각각 10~12명을 모집해 왔다. 해녀사공이라 불린 이들은 자신이 모집해 온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챙겼다. 많을 때는 제주도 해녀 50~60명이 육지로 올라와 동해안 마을에서 출가 물질을 했다. 이렇게 바깥 물질을 나간 해녀들 중에는 마을 총각과 결혼해 정착하는 경우도 있있다. 황 선수의 어머니가 그런 경우였다.

제주 해녀의 걸음이 줄어든 것은 1980년대 들어와 양식 미역이 유통되면서 부터다. 지금 자연산 미역의 몸값이 더 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질이 고르지 않고 변색이 많아 시장 경쟁에서 밀렸다.

이후 강원도까지 '육당'을 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강원 해녀는 이후 지역에 자리를 잡은 제주 해녀의 2.3세대, 지역에서 물질을 배운 해녀들로 설명할 수 있다.

초도항 해녀상.
초도항 해녀상.

△잠수어업인? 나잠어업인?
강원도 환동해본부 자료를 보면 강원 동해안 해녀는 지난 2013년 353명, 2014년 352명 2015년 327명, 2016년 327명, 2017년 371명, 2018년 380명, 2019년과 2020년 316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숫자가 잠수어업인 중 여성만 구분했다는 점이다. 강원도의 전체 잠수어업인은 736명이다. 316명을 뺀 나머지는 잠수기선, 이른바 머구리 작업을 하는 남성이다.

나잠어업인으로 집계한 숫자는 지난해 기준 688명이다. 강원도의 나잠어업인 안전보험 지원사업 실적을 보면 매년 160~170명이 혜택을 받는다.

수치가 맞는지를 따지기 보다 강원도 6개 지역에 해녀가 남아있음을 살폈다.

가장 북쪽인 고성군 지역에 해녀 수가 가장 많다. 이어 삼척과 강릉, 속초, 양양, 동해의 순이다. 

이들 사이에서 제주 해녀의 흔적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강원도 최북단인 고성군 대진나잠연합회 회장인 오용분 해녀(73)는 충청도 출신이다. 결혼을 하면서 24세에 강원도 고성에 왔다. 오 해녀가 물질을 한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만 제주에서 온 해녀들이 자맥질을 하는 것을 보며 어깨 너머로 배웠다. 오 해녀는 "나 뿐만 아니라 여기 해녀들은 미역 작업이나 하지 물질은 잘 못했다"며 "물에 들고 나는 것이 잠수 기술이더라. 처음엔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해녀 일 하면서 아이들 대학교까지 가르쳤다"고 말했다.

처음 물질을 할 때와 비교해 바다에서 물건을 건지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작업 환경도 제자리 걸음이란 점이다. 오 해녀는 "해녀들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려고 몇 년 노력했는데 어촌계와 갈등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산됐다"며 "탈의실만 있어도 좋을 텐데 이래 저래 나아진 것이 없다"고 귀띔했다.

4.3 광풍 이후 밀려 밀려 강원도까지 왔다는 한 노해녀의 기억에는 늦게 배웠지만 자식을 건사할 수 있었던 감사함과 추운 날 허리 펴기 힘들었던 명태 작업이 남아있다.

△그곳에 '그녀들'이 있다
지난 8월 농어촌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강원 고성군의 KRC 크라우드 펀딩이 눈길을 끌었다. 해녀문화와 지역특산물인 돌미역을 연결한 콘텐츠를 대상으로 했다.

펀딩 대상지인 초도항이 강원도 해녀문화가 살아있는 마을이란 점을 활용해 후원자들에게 자연산 돌미역과 더불어 지역 해녀들의 특색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 어촌뉴딜3000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초도항은 이미 지난해 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바 있다. 화진포와 더불어 고성군 북부권 활성화의 요지가 될 초도항에는 앞으로 어항시설 정비, 안전시설정비와 함께 초도행복바다센터와 금구도 탐방 기반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이 안에 얼마만큼 강원 해녀의 특색이 녹여들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무엇이 됐던 해녀를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장치가 가동된다면 강원 해녀의 맥이 끊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속도를 늦출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특별취재팀=고미 방송미디어국장,김봉철 부장대우,이진서·김수환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해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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