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12. 독도 해녀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에서 미역 바다 향한 도전까지
의용수비대와 더불어 실효지배적 의의 상징으로 인정
가족.지역 위한 노력 남아 있어…'해녀 바위' 지명도

제주해녀의 독도 조업은 일제강점말기인 1940년대부터 시작돼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제주해녀의 독도 조업은 일제강점말기인 1940년대부터 시작돼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객고풍상/애향연금/성심성의/영새불망(객지에 나가 고생하면서도 고향을 사랑하여 돈을 내놓았으니 성실한 마음과 성실한 뜻을 영원토록 잊지 않으리')
제주문화원이 '한림읍역사문화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확인한 비석에 적힌 글이다. 비석에는 또 1956년 당시 울릉도.독도로 출가물질을 다녀온 해녀 2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발동기 단 목선 타고
독도까지 물질을 갔던 제주 해녀의 이야기는 사실 새롭지 않다. 제민일보는 지난 2009년 독도 물질을 갔던 해녀들의 흔적을 추적했다. 입소문을 통해 독도에 다녀왔다는 해녀를 찾고, 다시 울릉도와 독도에 살고 있는 해녀를 만나 그들의 기억을 기록했다.

독도 물질을 했던 제주 해녀는 경상북도가 2009년 2011년 「독도주민생활사」등 자료집을 제작하면서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는다. 이후 학계 등을 통해, 특히 독도 영유권 분쟁이 있을 때면 언론에 노출되곤 했다.

제주해녀가 독도 바다에서 자맥질을 했다는 기록은 일본 시네마현 '다케시마 관계철'에서 찾을 수 있다. 1941년 '제주에서 해녀를 데리고 가 강제 노역을 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앞서 1921년부터 조선인을 독도로 끌고가 전복과 소라 등을 따도록 했다고 하는 내용도 나온다. 제주, 여성이라는 구체적 언급은 없지만 당시 미역류가 아닌 해산물 채취가 가능했던 대상을 감안하면 해녀가 포함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제주해녀박물관 등의 자료를 보면 제주해녀의 독도 조업은 일제강점말기인 1940년대부터 시작됐고, 광복 이후 한국인 선주들에 의한 미역 채취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된다.

처음 10명 이내였던 제주해녀의 독도조업은 1950년대 후반에는 20~40명으로 규모도 커진다. 이 시기 미역 등의 시세가 좋았던 것을 감안하면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들어가 포항으로 이동한 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꼬박 3~4일을 배에서 보내야 했던'사정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1956년 울릉수산업협동조합이 독도 미역 채취독점권을 가지면서 주춤하기는 했지만 이후 1980년대까지 제주 해녀가 독도에서 작업을 했다는 증거가 나온다.

해녀 일제 강제노역 모습.
해녀 일제 강제노역 모습.

△아기업개 데리고 간 섬
독도 출가 해녀들의 인터뷰 기록을 다시 꺼냈다.

김공자 해녀(79)의 독도 기억은 1959년부터다. 고무옷이 없던 시절이라 물적삼과 물소중이를 챙겼다. 테왁 대신 양철 깡통을 물에 띄웠던 적도 있었다. 독도까지는 발동기를 단 목선을 타고 갔다. 10시간 넘게 배를 타고 이동했다. 몇 년 독도까지 가기 위해 뇌물도 썼다는 말도 나왔다.

한림 등 서쪽 해녀들의 이야기 외에도 동쪽 구좌읍 행원 출신 고춘옥 해녀(작고)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족 모두가 울릉도까지 갔고, 30대 중반에 독도 바다를 헤집었다. '울릉도 산 떨어지면 독도 산이 보이고, 독도 산이 떨어지면 울릉도 산이 보인다'고 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미역 시세가 좋다보니 한 번 들어가면 한달 이상 머물러야 하는 독도 살이를 1년이면 서너 차례나 감수했다.

하도리 조봉옥 해녀(작고)와 임화순 해녀(작고)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독도 물질을 감행했다. 한 번 작업에 20~30일이 소요되는 터라 아기업개를 구해 데리고 가거나 남편과 함께 독도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일도 힘들었지만 배고픔 역시 참기 힘든 부분이었다. 배가 한정되다 보니 보리쌀과 된장 등 간을 할 수 있는 몇 가지밖에 짐에 넣을 수 없었다. '모자라면 더 가져다 주겠다'는 약속도 믿을 것이 못 됐다. 현지에서 미역보다 덜 귀했던 소라를 감자처럼 쪄서 먹었다는 얘기에는 웃음도 안 나온다.

해녀들의 기억은 비교적 정확하다.

광복 전까지 일본인들을 통해 독도에 갔던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 독도에서 어업조합을 운영했던 일본인의 기록을 보면 당시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전량 일본으로 보내졌다.

광복 후 1950년대 후반까지는 전문적인 모집원에 의해 단체로 독도에 들어갔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자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제주해녀를 모집했다는 내용 역시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1956년 개인의 독도 어장권 입찰이 가능해지며 기업형 미역 채취가 가능해졌고 제주에서 모집하는 해녀 규모도 늘었다. '5명씩 조를 짜 작업했다'는 시기다.

바깥물질은 물론이고 여러 이유로 제주를 떠난 뒤 생계를 위해 물질을 하다 독도까지 들어간 경우, 이중에 다시 현지에 터를 잡거나 다시 고향에 돌아온 사례까지 독도 물질의 서사도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독도에 살았다'는 실효지배적 의의의 상징으로 읽는 것 역시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다.

△'내 바다처럼' 기억 생생
독도 미역 조업은 3월에 시작해 5~6월까지 이어졌다. 채취한 미역은 독도 주변 바위에 널어 말렸다. 해녀들이 미역을 말리던 '가재섬'은 지금 가재바위라는 지명으로 기록돼 있다.

독도 물질을 해봤던 해녀들만 기억하는 내용도 있다. 발동기를 타고 독도 바다에 가서 모르게 작업을 하고 몰래 돌아오는 '솔짝치기'다. 어업권을 얻지 못한 지역 주민들이 해녀 몇 명을 모아 작업을 했다. 새벽 5시에 출발해 동틀 무렵 물에 들어가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30분도 안돼 한 망사리를 충분히 조물 정도'(박순재 명창.74)였다. 소라도 지천이었지만 돈이 되는 전복만 잡았다. 껍질에 감태가 수북한 '머드레 생복(실력 좋은 사람이 잡아오는 큰 전복)'을 잡았던 기억도 남아있다.

제주해녀들의 독도 물질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또 있다. 독도 해녀바위다. 1980년대 초 선박 접안을 위해 접안장 및 독도 경비대 물품수송용 삭도를 설치하면서 기계장치를 뜻하는 일본어 '동키'를 사용해 동키바위로 불렀던 것을 2012년 국토지리정보원이 국가지명위원회를 통해 해녀바위로 바꿨다. 미역 채취를 위해 제주도 등지에서 건너온 해녀들이 쉬었던 기억을 지명으로 남긴 것이다.

해녀바위 인근 바닷속 풍경은 울릉도.독도 10대 수중 비경 중 하나다. 해녀바위 주변 크고 작은 암반에 서식하는 녹조와 갈조류들이 '녹색정원'을 연출한다.

지나가는 배만 봐도 반가웠던 독도 물질의 기억 속에 해녀들은 합자(홍합)가 지천이고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던 강치와 물이 깊지 않고 여가 많아 작업하기 좋았던, 말그대로 '없는 것이 없었던' 바다가 있다.

특별취재팀=고미 방송미디어국장,김봉철 부장대우,이진서·김수환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해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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