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제주방어 봉수대·환해장성 등
도민, 제주문화 이해 계기돼야

제주도 해안 전체를 방어한 환해장성은 '탐라 만리장성', '해안 성담' 등으로 불리며, '환해장성'이라는 명칭은 1918년 김석익이 편찬한 '탐라기년'에 처음 등장한다. 환해장성은 바다로 침입해 오는 왜적들을 대비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현무암으로 쌓은 장성이다.

이러한 환해장성은 1988년 1월 7일 제주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하고 있다. 현재는 제주도 전체의 장성이 아닌, 일부분만 복원되어 있다.

해안가 부근에 왜적의 배를 발견하고, 소속된 진성에 알리기 위해 쌓은 연대와 봉수대는 옛 군사 통신시설로 봉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왜적의 배가 발견되면, 긴급히 횃불이나 연기를 통해 9진과 3성에 알린다.

봉수대(38개소)와 연대(25개소)의 차이점은 봉수대는 별다른 설치 없이, 오름 정상에 세워 횃불을 피웠으며, 연대는 해변에서 높은 지대에 현무암으로 높게 쌓아 50리(약 20㎞) 밖을 경계했다.

밤에는 횃불을 사용했으며, 낮에는 연기를 통해 왜적의 침략을 알렸다. 혹여나, 날씨 관계로 봉수 연락이 불가능할 경우, 봉졸이 직접 달려가 연락을 했다.

연대와 봉수에서 횃불과 연기가 보이면, 진성에서 급히 병사들을 보내어 방어를 한다.

환해장성과 연대, 봉수대는 9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9진은 읍성(제주성, 정의현, 대정현)에서 관리했다. 이러한, 제주의 옛 성지(읍성)는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제주시내 중심에 위치한 '제주도 기념물 제3호 제주성지'와 대정읍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주도 기념물 제12호 대정성지'가 위치해 있으며,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국민민속문화재 제188호 성읍민속마을(옛 정의현)' 등이 조선시대 제주도를 관리한 관청이 있던 곳이다.

그중 대표적인 제주성은 언제 쌓아졌는지 알 수 없으나, '태종실록'을 보면, 제주성은 1411년 이전에 축조되었다는 문헌이 있다. 

또한, '신종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성곽의 둘레가 4394척, 높이 11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 사이에 축성된 규모이며, 지금의 성곽의 기초가 되었다. 이어 1565년(명종 20) 목사 곽흘이 을묘왜변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성곽의 규모를 확대하고, 격대와 타첩을 갖추었다.

시간은 흘러,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한다는 이유로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면서 제주성의 옛 자취는 대부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아 있는 성벽은 조상들의 축성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판단해,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 및 관리하고 있다.

이외, 대정성지의 규모는 성벽의 둘레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다. 반면, 정의성지의 규모는 둘레 2986척, 높이 13척이다.

제주도 문화재 중 옛 방어시설은 3성·9진·25봉수대·38연대·10환해장성으로 제주의 문화를 제주도민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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