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다시 가을이 왔다. 연두와 초록의 시간을 뒤로 하고 단풍과 낙엽의 시간이 왔다. 무덥고 지루하던 여름의 더운 공기가 어느새 차갑고 싸늘한 기운으로 바뀌어 간다. 그토록 극성을 부리던 열기가 계절의 변화 앞에서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봄에는 새로 피어난 꽃들이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 시간이었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들이 서로 몸 부비며 서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가을은 익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는 시간이다. 들판에서 익어가는 것을 바라며 거두어야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알곡이든 쭉정이든 모든 것을 수확하는 가을은 행복한 시간이다. 익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우리도 익어가게 된다.

가을은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고, 붉게 물든 단풍에 누군가에게 보낼 가을편지를 쓰는 시간이다. 가을에는 모두 시인이 된다. 낙엽 지는 거리를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가을을 말할 수 없다. 단풍이 비 내리듯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가을을 말할 수 없다. 가을은 깊어갈수록 우리의 가슴속으로 몰려 들어와서 고독과 슬픔만 남기고 떠나버린다.

가을을 이야기하면서 독일의 시인 릴케를 빠뜨릴 수 없다. 어느 시인은 가을은 릴케의 시에 입 맞추는 시간이라고 한 적이 있다. 릴케는 「가을에」라는 시에서 가을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 날」 전문)
  
10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릴케의 시집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는 인간 존재의 긍정을 희구하는 현대적 예술정신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유명하지만, 루 살로메와의 사랑으로 더욱 유명하다. 살로메는 "모든 사랑은 비극에 기초해 있다. 행복한 사랑은 넘쳐서 끝장이 나고 불행한 사랑은 모자라서 끝장이 난다."고 말하면서 릴케의 시를 더욱 깊어지게 한 것인지 모른다. 릴케는 "생의 진실은 고통과 직면해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 절대고독과 슬픔이 삶을 더욱 절실하고 깊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낙엽과 고독이라는 단어를 말하게 하고 알려주는 진짜 가을이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왔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외로움과 고독이란 두 글자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지게 된다. 그렇지만 가을의 시간도 곧 겨울에 자리를 내어주며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미지의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꿈에 사로잡히게 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은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가을에는 우리 모두의 꿈이 실현되고 삶에도 축복이 가득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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