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름 4·3 주둔소로 향하는 풀숲에서 겨울딸기를 발견했다. 같이 가던 일행도 발걸음을 멈추고 겨울딸기를 따서 입속에 넣으며 탄성이 자자하다. 시큼새큼 먹을 만했다. 심장과 심장 사이에 올망졸망 붙어 있는 붉은 열매는 마치 잊혀진 진실을 고하듯 숨죽인 채 영롱한 눈빛을 하고 있다. 


 서호리 시오름 주둔소는 1950년대 초, 지역 주민들과 인민유격대의 연결을 막기 위해 경찰이 설치한 방어막이다. 서호리 주민뿐만 아니라 호근리·강정리·법환리 등지의 주민이 총동원되어 한 달 만에 쌓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견벽청야(堅壁淸野), '적'이라 규정되던 무장대에게 가옥과 식량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방어막을 친 셈이다.


 시오름 주둔소는 지금 남아있는 다른 주둔소에 비해 비교적 잘 정비된 채 보존 중이다. 주둔소의 모양은 삼각형으로 당시 경찰들이 방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초가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성벽 중간에는 약 4∼5m 간격으로 너비 33㎝, 높이 20㎝ 가량의 총안(銃眼)이 나 있다. 그 구멍으로 밖을 보니, 하천의 바위들이 보인다. 내성, 외성, 총안, 보초막 등 철두철미한 방어막을 쌓기 위해 당시의 주민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의 형, 삼촌들을 죽이기 위해 마찬가지로 마을의 형, 삼촌들이 동원됏다. 내가 나에게 총을 쏴야 하는 학살의 비극을 철두철미하게 진두지휘한 흔적이 바로 주둔소다. 진눈깨비 날리는 날에 돌을 등에 지고 계곡을 올랐을 사람들의 낯빛을 떠올려 본다. 벗겨진 등가죽에 흥건하게 핀 붉은 피, 그 피가 뭉쳐 겨울딸기가 됐다면 너무 시적인가 싶어 겸연쩍어진다. 

아프다, 나는 쉬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한때는 자랑이었다
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들 불러모아
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
아무런 죄도 없이, 상처도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

이제 내가 부른 꽃들
모두 졌다

아프다,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꽁꽁 얼어붙은
내 몸의 수만 개 이파리들
누가 와서 불러도
죽다가도 살아나는 내 안의 생기가
무섭게 흔들어도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오봉옥의 시, 「꽃」 전문

 오봉옥 시인의 시집 『붉은 산 검은 피』에 나온 시다. "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들 불러모아/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 노래를 부르니 겨울딸기가 핀 것일까? 한때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광장에서 총구에 맞서 싸우던 이들이 감옥살이를 많이 했다. 오봉옥 시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1930년대 항일투쟁시기부터 1946년 10월 항쟁(대구폭동)까지의 민족운동사를 형상화한 시집 『붉은 산 검은 피』 발간이 시인을 감옥으로 가게 한 이유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죄가 되는 시대가 있었다. 


 화순탄광촌 노동자 학살 사건은 1946년 전라남도 화순 탄광촌에서 미군정이 노동자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은 광주에서 개최되는 8·15 1주기 기념식 참석차 길을 나선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해 진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화순 탄광촌은 해방이 되면서 탄광을 관리하던 일본군이 퇴각하자 자치위원회를 결성해 탄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소유였던 탄광을 관리하기 위해 미군정이 들어온다. 이들은 자치위원회를 불법으로 규정, 탄광 소장을 교체하고 노조를 위협해 노조 간부 3명과 100여명의 노동자를 해고한다. 그리고 8·15 1주기 기념식 참석하던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해 살상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발발 1년 전, 화순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 이미영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초토화작전> 한 장면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아주 귀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상영됐다. 영어 제목은 'Scorched Earth'로, '그을린 땅'이라는 뜻의 다큐멘터리이다. <초토화작전>은 남한 북한, 미군, 소련군…, 등의 대결구도로 치뤄진 전쟁사 프레임을 넘어 미공군의 잔학상을 고발한다. 폭격에 가담한 이들과 민간인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의 실체를 클로즈업 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3년 동안 미 공군의 공중 출격은 무려 104만 708회, 기총 사격 1억6685만3100회를 발사했다. 점화성 물질로 만들어진 네이팜탄 사용량 3만 2357톤에 이른다. 폭탄 총사용량은 63만 5000여 톤에 이른다니 그 수치가 의미하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전쟁 민간인 폭격에 관한 기밀해제 미군 보고서'에 의하면, "통제관은 포항 이북의 모든 것이 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미군정하의 군·경의 발표와 유사하다. 그로 인해 제주도민 3만여 명이 학살당한다. 


 학살의 역사, 국내에서 자행됐던 학살만도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겹다. 화순탄광촌 노동자 학살 사건, 제주4·3사건, 노근리 학살사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천정(하늘)에서 뭐가 뚝뚝 떨어져서 보니까 다리와 팔이었다."고 증언하는 이들 앞에서 우리는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은 언제나 겨울이어서/ 가도 가도 외롭고 추운 곳이지만(...)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어서/ 함께 살아가고/아직은 훈훈한 사람이 있어/ 따뜻해지네"(문철수 시)라고 노래하는 것이 가끔은 미안해진다. 그래도 빨간 겨울딸기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피어 열매를 맺으리라 다짐 해보는 것은 '붉은 산 검은 피'의 역사성을 알기 때문이다. 검은 피를 먹고 자란 겨울딸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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