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당한 사람 무고한 양민"

 사상 처음 법정에 서서 4·3 당시 피해상황을 50여년만에 증언한 5명은 또렷한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되살리며 답변했다.다음은 증언 요지.

◈"만삭 어머니도 총살"

 ▲김홍석씨(63)=남제주군 남원읍 의귀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동생들과 함께 마을 근처 들녘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49년 1월20일께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도망치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지금도 엄지손가락에 총상이 남아 있다.

 20∼30분 뒤 돌아와보니 군인들에 끌려가던 8살·6살된 동생이 뒤처진다고 총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고 만삭이던 어머니와 4살된 동생 역시 총살당했다.당시 내 어머니와 같이 끌려간 사람들이 트럭 2대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보다 열흘 가량 앞선 1월9일께에는 의귀리 주민 100여명이 군경에 의해 의귀교에 갇혔다가 이튿날부터 군인들에 의해 총살돼 큰 구덩이 3개에 나눠져 이장된후 83년께 유족들이 그 묘 앞에 ‘현의합장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온 마을이 같이 제사"

 ▲오국만씨(69)=48년 11월22일께 군경에서 명령한 소개령에 따라 남제주군 표선면 표선리로 내려와 부모와 함께 수용생활을 하다 한달뒤인 12월22일께 군인들이 가족 전부가 소개돼온 집과 그렇지 않은 집안을 나눠 줄을 세웠다.그리고는 가족중 한명이라도 없는 집안은 소위 도피자 가족이라는 구실을 붙여 현재 표선변전소 앞에 있는 밭으로 끌고가 총살했다.

 당시 내 부모를 비롯,총살당한 사람이 알려진 숫자만 76명에 이르며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던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또 표선리로 소개된 중산간지역 주민들중 일부가 표선백사장 부근(현 표선민속촌 앞)에서도 여러차례 총살당해 지금도 내가 사는 가시리 마을에서는 음력 11월21일이면 온마을이 제사준비로 분주한 실정이다.

◈"9살난 아들에 총격"

 ▲양복천씨(83·여)=48년 11월13일 새벽무렵 잠을 자다 갑자기 총소리에 놀라 뛰어나와 봤더니 조천읍 교래리 온마을이 불바다를 이뤄 남편은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군인들이 죽인다'는 소문에 달아났고 나는 설마 여자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에 그냥 집에 남았다.

 그러나 잠시후 들이닥친 군인이 총을 겨누자 살려달라고 비는데도 총을 쏴 옆구리를 관통했다. 순간 당시 9살난 아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자 다시 아들을 향해 총을 쏘아 즉사했다.또 내가 관통상을 입으며 등에 업힌 3살 난 딸의 무릎까지 관통,두번째 생일을 맞은 그날 이후 딸은 아직까지 불구로 살아오고 있다.

그날 새벽은 우리 집만이 아니라 군인들이 교래리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바로 앞집인 김인생씨 가족들은 3살·5살 난 어린애들은 물론 젊은 며느리까지 총에 맞아 줄초상을 당했다.

◈"시신위로 불질러"

 ▲고남보씨(69)=48년 11월13일 새벽 군인들이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로 들이닥쳐 주민들을 집합시킨 뒤 50∼60여명의 주민들을 모두 밧줄로 서로 이어묶어 폭도가 있는 곳을 가리키라며 끌고 다녔다.

 그러다 이날 오후 5시께 한 군인이 어디론가 무전을 치더니 “너흰 10분내로 총살된다”고 말한뒤 곧 군인차가 올라왔다.나는 급히 결박을 풀어 숲속으로 도망쳤지만 내 아버지와 16살·7살 난 동생등 나머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총살당했다.군인들은 이들 시신위로 식량과 이불을 덮어놓고 불을 질렀다.

◈"60∼70대 노인도"

 ▲임완송씨(69)=48년 11월13일께 군인들이 조천읍 와흘리를 덮쳐 불을 지르고 미처 피하지 못한 60∼70대 노인과 부녀자,어린아이들까지 살해했다.이어 소개령에 따라 조천읍 신촌리에 거주하던 48년 12월9일께에는 군인들이 큰 형인 임기송씨를 끌고 가는 것을 직접 봤다.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며칠 뒤 시체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조천읍 함덕리 서우봉 옆에서 큰 형의 시신을 수습,매장했다.

 또 같은해 12월21일께에는 작은 형마저 제주읍내 농업학교에 수용됐다가 ‘박성내’라는 냇가에 끌려가 총살당했다.당시 박성내에서 숨진 사람만 30명이 넘고 그 곳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김태준씨는 생전에 “군인들은 냇가 바위까지 끌고가 10명 단위로 총을 쏴 떨어뜨리고 휘발유를 뿌려 방화까지 했다”고 공개,그때서야 희생자들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게 됐다.

 내가 94년 2월께부터 시작된 제주도의회 4·3피해신고 접수에 따라 같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피해를 수합한 결과 직접 파악한 것만도 76명이나 됐다.<고두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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