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폭설로 항공기 운항이 전면 중단되거나 지연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비행기 운행을 중단한 원인은 폭설이라기 보다는 강풍과 급변풍이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게 하는 것은 양력과 바람의 힘이다. 하지만 바람의 힘이 너무 세거나 급변풍과 같은 이상 현상을 만나면 뜨고 내리는 것이 급속도로 불안정하게 돼 운행이 중단되는 것이다. 과학에는 문외한이라 고속도로를 달리다 갑작스런 비포장도로를 만나 차가 뒤집힐 수도 있는 현상과 유사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저수지에 살얼음이 얼었다. 새 한 마리 숨죽이며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어쩌다 한 쪽 발에 힘을 준다면 '쩌억' 하고 금이 갈 판이다. 물오리는 보이지 않고 참새들이 갈대숲을 이리저리 날다가 내리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열매들마저 다 땅속으로 스며들어야 할 계절이기에 새들의 생존도 만만찮은 것이다. 어떤 말의 의미가 갑작스레 궁금하거나 '아, 이거구나'하고 깨달아질 때가 있다. 풍경과 의미와 기운이 통합을 이뤄 나타나는 '의미의 자각' 순간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지리산 아랫마을 산내마을, 산이 정말 마을을 품고 있다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면 천왕봉이요, 눈을 감으면 실상사 종소리가 들린다. 시골에 가면 사실 보이는 건 개와 노인들이다. 하지만 이곳 산내마을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꽤 들린다. 동네 클린하우스 정리 당번도 마을 청년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있다고 한다. 이주해온 사람들이 이런저런 모임도 만들고, 마을소식지도 만들어 나누고 하면서 새로운 활기가 돋고 있다. 

눈보라에 갇힌 지리산 바라보다
實相寺에 발자국만 남기고 돌아오는 길
폭설에 쓰러진 소나무 한 그루의 實相을 보았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그렇게 산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있었지
폭설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오히려
눈꽃을 피우며 산다는 사람이 있었지
그 모습 그대로 겨울을 이기고 마침내
봄이 오면 푸르른 강산에
홀로 우뚝하리라던 사람이 있었지 

어느 폭설 내리던 겨울밤
그 사람 결국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 정정하던 가지 부러져 갔느니
그 쩡쩡하던 둥치 쓰러져 갔느니
늘 푸를 수는 있어도
늘 우뚝하지는 못한 사람
그렇게 한 시대의 假相으로 묻히어 갔느니 

돌아보면 지리산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 저기 저 산
쓰러지지 않는 저 소나무들
내려오지 않는 저 소나무들
눈꽃을 피우며 폭설 속에 묻히어 가느니, 다만
눈보라만이 세상 요철을 다 메우려는 듯
새떼처럼 우우 산을 내려오누나
실상사에 두고 온 내 발자국, 이젠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리, 지리산
실상사 다녀오는 길에 본, 유독
잊히지 않는 쓰러진 소나무의 實相.
 -안상학 시, 「지리산」 전문

여행의 초행길은 언제나 낯설지만 새로운 자각으로 인한 즐거움도 있다. 책에서나 본 풍경들의 실재를 목격하는 순간, 덩어리져 얼어 있던 어떤 것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다. 소나무도 알고, 실상사도 알고, 찬왕봉도 들어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허상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름만 들었던 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느끼는 경외감을 여행이 채워주는 것이다. 대상과의 실제적인 만남이라는 여행을 통해 한층 겸손해지고 겸허해지는 쾌감을 느낀다. 그런 쾌감을 얼마나 많이 느끼는가에 따라 삶의 의미와 해석도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여행은 정신의 한 살 더 먹기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겠다. 마음이 한 살 더 먹으면 좋은 것은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방어막을 치고 있던 대상을 좀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고 급기야는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로빈 라이트 감독의 영화 <랜드>(2021) 한 장면

산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디(로빈 라이트 역)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휴대폰마저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이라 산속에서의 삶은 실수와 고통의 연속이다. 준비해 온 통조림과 식량은 동이 나고, 이제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 가족을 잃었기에 무언가를 죽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사냥을 해야만 살 수 있다.
 
거의 아사 직전까지 갔으나 사냥꾼 미겔(데미안 비쉬어 역)을 만난다. 그는 자신의 담당 간호사를 데리고 와 이디를 간호하고 목숨을 구한다. 그렇게 그 둘의 인연은 시작되고 서로를 염려하는 사이가 됐으나 미겔은 사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이다. 어느 날 자신의 개를 그녀에게 맡기고, 곧 돌아오겠다고 하더니 오지 않는다. 미겔이 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디는 배낭을 메고 산을 내려가 마을에서 미겔을 찾는다. 하지만 그는 병으로 죽음 직전이었다. 미겔은 이디에게 자신이 쓰던 휴대폰을 선물하고 죽는다. 망설이던 이디는그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한다. 세상과의 화해가 이제 시작된다. 

폭설의 늦은 밤에 이 영화를 보면서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얻은 이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건 공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만큼이나 상처가 깊은 미겔, 그는 이디의 편에서 생각하고, 그녀에게 맞는 방식으로 도움을 줬다. 그리고 자신이 돌아갈 길을 알기에 너무 서두르거나 과하지 않은 태도로 이디를 돌봐주었다. 그런 태도가 이디의 마음을 스르르 열게 했다. 지금 이 계절의 시간도 어쩌면 살얼음의 시간이지 아닐까 싶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조용한 기다림과 먼 데서 서로에게 보내주는 작은 기운들이지 않을까. 아픔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둠의 시간은 좀 더 필요하다는 걸 새기는 새벽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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