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라 그런지 동백 꽃잎에 이슬이 맺혔다. 4월의 눈물이다. 요즘 북촌리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 나누기 시간을 갖고 있다. 어린시절 이야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시간에 눈물이 태반이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숨이 깊다 못해 쓰리고 아픈 이야기들에 젖어 한참이나 숨이 멎을 때가 있다. 그 아픈 시간들을 어떻게 건너왔을까 하는 아득함과 몸에 박힌 사기그릇 같은 고통의 시간을 이야기하게 하는 것 또한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죄스럽기도 하다.
“말을 허젠 허민 목이 맥형 골아질 말이우과? 나 살아온 말을 곧젠 허민 소설 스무권은 더 될구어두다. 어떵헌 세월을 살아온디사 골으민 알아지쿠과. 에구 델로와. 델로와. 구뎅이에 민밋 이래착 저래착 포개연 쓰러젼 있고, 베랭인 바글바글 궤염고, 눈 속안이 베랭이들이 바글바글…. 하르방 눈 알에 베랭이 손가락을 다 파멍 거두언, 하이고. 나가 열네설에 겪은 일이우다.”
이미자의 노래 ‘동백아가씨’를 부르는데, 하나같이 가슴에 손을 모아 부르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각자의 동백아가씨가 가슴에 박힌 것이다. 어디서 눈물이 고여 있었는지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하단다. 아직 살아 있구나, 여든이 넘고 아흔이 넘었는데도 나, 아직, 살아 있구나! 4‧3 73주년을 맞는 이들, 살아있는 자의 슬픔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르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레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한 강 시,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전문
죽음의 길로 떠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라고 크게 한 번 불러 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 울음을 쏟아내던 어르신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한 번 아버지라 불러 보라고 하니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세 번 불렀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여든이 넘어도 아버지가 필요한 아이의 울음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에 다들 참았던 울음이 쏟아지고 말았다. 각자의 아버지, 어머니, 누이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의 그림을 그렸다. 한 어르신이 그린 그림 속 누이는 남동생의 손을 놓은 채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여섯 살 된 동생의 손을 놓치고 영영 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아직도 그 동생을 생각하면 죄스러움에 잠을 설친다고 하는 얘기에 4‧3의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남동생의 마지막 눈빛이 생생하단다. 잊으려고 해도 더 선명하게 떠올라 괴롭단다.
▲ 아피 폴만 감독의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2008) 한 장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은 ‘1982년 레바논 전쟁의 경험이 만들어낸 책임감과 도덕성에 대한 열정적이고 도발적인 고찰’이라는 감독의 변으로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내전 개입과 과정에서 자행됐던 사브라 샤틸라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영화에서 '바시르'는 학살의 촉발자이며, '왈츠' 는 학살에 참여한 군인들의 총기난사 장면을 은유한다. 영화는 레바논 전쟁이 끝난 20년 후, 전쟁의 트라우마로 기억 자체를 상실한 한 영화감독이 친구와 전우들을 만나면서 기억을 되찾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만난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과거에 겪었던 끔찍한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는다.” 그리고 “과도한 피해의식이나 강한 죄의식의 경우 무의식적 방어기제 발동으로 인해 잊혀질 수도 있다”고. 영화의 엔딩 장면은 학살로 인해 울부짖는 사람들 너머, 켜켜이 쌓여 있는 시체들을 비추면서 끝난다. 잊었던,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현실로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전쟁의 참상과 더불어 기억과 망각, 트라우마의 상관성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누구나 겪은 일이기에 이제는 잊는 게 좋다고 아무리 말한들 당사자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죽음과 같은 참상을 목격함으로 인한 트라우마도 있지만 사실 더 심각한 것은 죄의식이나 피해의식으로 인해 기억의 밑바닥으로 밀어버린 어떤 실제다. 그것은 무의식에 남아 일상을 조종하고, 극단적인 왜곡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으라고 하는 말보다는 기억하라는 말이 치유적으로 더 적절하고 효과적이다. 치유의 과정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못다한 울음으로 다 쏟아낼 필요가 있다. 울음은 아주 중요한 애도 방식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데리다는 말한다. “고인은 단지 현존과 부재 사이에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타자성은 기억 속에 보존됨으로써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을 극복한다.”고. 전쟁으로, 폭력으로, 혐오의 시선으로, 고립으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의 평온을 위해 4월은 충분히 울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일제히 깨어나는 봄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