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
물질문명과 과학기술 만능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가장 심각한 우려와 회의(懷疑)는 대체 인간들에게 영혼이 있는가. 영혼은 무엇이며, 영혼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을 말하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인간의 탐욕과 타락과 위선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그러할 때 대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이 같은 의문이 어제오늘에 나타난 일은 아니다. 삶을 살아갈수록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거짓과 탐욕이 보편적 습성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습성이 개인적인 타락은 물론, 심지어 사회적인 폭력과 지배를 되풀이하면서 항구적인 인간성이 되어버렸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과 내란과 폭력이 되풀이되고 있으며, 개인들은 누군가를 속이며 위선과 탐욕의 삶이 보편화되고 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나무나 꽃과 같이,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모두 인간의 잘못된 심성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같이 순리적으로 반복되는 질서나 섭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를 속이거나 경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삶의 양태는 자본주의라는 물질 만능의 삶의 질서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물질과 기술은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신격화된 대상이며, 인간과 자연의 모든 질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자만을 낳게 되었다. 돈의 힘에 의해 인간의 정서와 영혼은 부식되어 무력화되어버리고, 그로 인한 비인간화는 오늘날 인간사회의 근본조건이 되어버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릴 때에도 수시로 멈추어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 뒤따라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에 비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신들의 영혼을 되돌아보고 있는가.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온전한 인간다운 삶인가? 많은 돈을 버는 것,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남보다 앞서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억압하는 것, 그리하여 승자가 되는 것이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이런 일에 몰두하느라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가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오직 물질과 육체에 탐닉하면서 정신과 영혼은 내던지고 살아가고 있다. 과연 자신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혹은 거짓되고 위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두려워하면서 오로지 앞만 향해서 달려간다.
그들은 영혼이 마비된 채 아무리 비열하고 파렴치하게 나쁜 짓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다른 위선자들과 함께 사회는 더욱 타락해 가게 될 것이다. 위선과 타락이 득세하면서 우리 시대에 진정한 아름다움도 사라져가고 있다. 정신과 영혼의 아름다움이 상실되면서 사람들은 외면적인 의식주와 같은 눈앞의 세속적 아름다움만 추구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혼과 정신이 떠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물질과 육체뿐이다.
오래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삶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의 저술 「영혼에 관하여」의 핵심 과제는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과 동물의 영혼은 어떻게 다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를 따지면서,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올바른 영혼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철학적 탐구에 동참하면서, 물질과 육체의 욕망에 오염되어 있는 우리들 삶의 모습을 다시 한번 깊이 되돌아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