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김지하 「밥」
밥이 없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그 중에서도 밥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입는 것과 주거가 없이도 그냥그냥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인간이든 동물이든 먹지 못하면 당장 생명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밥은 곧 생명이다. 한국인들의 흔한 인사는 "밥은 드셨습니까."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같이 밥으로부터 시작된다. 인류 전쟁의 역사를 곰곰이 살펴보면 많은 전쟁이 궁극적으로 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의 반의어인 평화(平和)를 한자로 들여다보면. "공평하게 밥을 먹는다."라는 의미로 구성되어 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적자생존의 이론도 식량 문제에서 출발한다. 현대와 같이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경우, 인류는 엄청난 식량 부족의 문제에 처하게 될 것이고 일정 한계를 넘어설 수 없게 된다. 기후변화와 질병의 위협으로 인류의 삶의 공간은 갈수록 힘들어 가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그 규모가 더욱 확산되는 전쟁과 내분의 중심에는 에너지와 식량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밥상 위에 오르는 쌀과 밀에서부터 시작해 국제적인 식량 안보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평하게 밥을 먹는다는 의미는 한 사회와 계층은 물론이고 생태계와 미래세대의 몫까지 정의롭게 보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먹고 산다는 것은 생존의 기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밥은 단순하게 먹는다는 차원을 넘어 문화적·사회적 가치로 존재한다. 배고픈 이들에게 밥은 생명이고 삶이었기에 우리의 선조들은 밥을 하늘이라 생각했다. 동학 교주인 최시형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이 먹고 있는 음식도 하늘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늘의 일부인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동학이 배고픔에서 시작됐고 배고픈 민중에게 밥은 곧 하늘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밥과 그 밥을 만드는 쌀의 의미는 너무나 가볍게 여겨진다. 음식문화의 지나친 발달로 인해 우리는 쌀 한 톨의 소중함을 너무 간과하고 있다. 아무리 음식문화가 발달해도 여전히 밥상의 주인공인 쌀 한 톨의 무게에는 바로 생명의 무게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다. 일 그램도 되지 않는 쌀 한 톨의 무게에는 경제적 논리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담겨 있다. 농부는 한 톨의 쌀을 생산해 내기 위해 흙, 바람, 햇빛과 같은 자연과 우주를 만나고 공경하는 성스러운 생산자이다. 이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시인 김지하는 「밥은 하늘 입니다」에서 밥을 이렇게 노래한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김지하의 시에서 '밥'을 통어하는 중심 사상은 생명이다. 죽음의 반대 의미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시인은 '생명성'을 현대의 인간 중심적, 과학 중심적 세계관에 대응하는 정신으로 제시한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논리에 따라 현대문명은 갈수록 죽음의 길을 치닫고 있다. 인간과 자연,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이분법적 논리가 지배하면서 밥이 지닌 생명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의 길목으로 들어선다. 가로수는 이파리를 떨군 채 가지만 앙상하다. 시골집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린다. 어느 시인은 '까치밥'을 따 버리면 '빈 겨울 하늘'만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까치밥은 세상을 삭막하고 허전하지 않게 하는 마지막 밥이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까치밥은 '따뜻한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밥은 곧 하늘이며 생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