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 한 가지를 손꼽으라면 극영화 한 편 만들어보는 일을 함께 한 것이다. 재능이랄 것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의 카메라기술과 편집, 연기력을 가진 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며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매사 즐거웠다기 보다는 긴장되고, 당황스럽고, 어리벙벙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군소리 없이 주어진 시간을 수용하며 함께 창작의 기쁨을 맛보았다는 게 더욱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바쁜 와중에 무슨 일을 또 벌렸냐며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눈길도 더러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절묘하게 시소를 타며 한 해 잘 살았다. 이제 편집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어떤 작품으로 완성될지 기대감이 크다. 

별방진에서 한 씬을 찍는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드나들었다. 한 무리가 가면 또 한 무리가 오고, 대체로 관광객인듯 싶다. 별방진은 돌담과 오름, 하늘과 노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사진을 찍으면 인생샷 하나쯤은 건질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다. 잘 정비된 돌담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의 별이 쏟아질 것 같은 곳이다. 물론, 그런 연출이 가능하려면 여름밤이 좋겠다. 원래의 뜻(別防鎭, 별도로 지어진 성벽)과 상관없이 소리말만 따져보았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사뭇 아름답다. 원래 뜻은 그냥 성벽의 의미만 담고 있다면 소리말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오히려 낭만적이다. 별이 쏟아지는 돌담, 별방진. 하기야 아무리 탁 트인 돌담이라 할지라도 영혼이 지친 자라면 그 위에 누워도 '흰바람 벽'에 갇힌 것 같을 것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는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시, 「흰바람 벽이 있어」 전문)

눈 내리는 마당은 고요하고 방안은 시끄럽다. 방 안에 있는 노인은 보일러도 틀지 않고 전국노래자랑이 나오는 TV를 본다. 진행자의 입담에 입을 헤 벌린 채 여간 재간둥이가 아니라며 오랜만에 미소를 짓는다. 노인에게 한 주를 버티게 하는 건 전국노래자랑일 것이라는데 한표다. 

자식보다 전국노래자랑이 더 좋다는 노인의 말에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방문하는 자식은 안심이 되기도, 서글프기도 하다. 노인을 돌보는 것은 TV와 들고양이다. 일주일에 방문하는 요양보호사는 생사를 확인하는 점검원에 불과하다. 가스는 잘 잠그고 있는지, 색칠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화장실에서 미끄러지지는 않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물론 자식보다 요양보호사가 낫다. 자식은 전화하면 짜증부터 낸다. 무슨 말인지를 통 알아듣지 못한다. 아무리 세게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 기다리라 해놓고 오지도 않는다. 그게 자식이다. 이건 나와 내 어머니의 이야기다.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는 곧 다가올 미래에 대한 너와 나의 이야기다. 85세 말임씨(김영옥 역)는 자식의 도움은 필요 없다며 홀로살기를 다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들(김영민 역)이 온다는 소식에 옥상에 올라갔다가 팔을 다치고 요양보호사 미선(박성연 역)의 돌봄을 받게 된다. 서울로 함께 올라가자는 아들의 말도 거부하고 미선과의 동거는 시작되나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다. 

말임이 미용실 손님 동숙에게 옥매트를 사게 된다. 아들은 이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한다며 으름장을 놓고, 돌려받은 돈은 미선이 잠시 차용한다. 사실은,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다. 미선은 어머니의 병원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미선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미선은 다시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그때 말임이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한다. 병원에서는 초기치매 판정을 내린다. 미선을 향한 말임의 말, "너 나랑 살자", 둘은 새로운 동거를 위한 바닷가 여행을 떠나면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영화롭게 끝났지만 남아 있는 현실은 마구마구 춥다. 추워도 보일러를 틀지 않는 노인의 방을 생각한다. 10시만 되면 전기를 끄라고 궁시렁대는 노인을 생각한다. 가난이 몸에 밴 노인들은 보일러도, 전기도 사치다. 전국노래자랑이 유일한 위안이다. 싸락눈에게 부탁한다. 제발 싸락싸락 내리지 말고, 소복소복 쌓여줘. 우리 엄마 보일러도 안틀어. 네가 이불이 되어주렴. 부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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