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젊은 시절에는 걸핏하면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곤 했다. 흔들리는 기차의 진동과 소음에 몸을 맡기고 낯선 세계로 달려가던 시간의 경이로운 기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기차가 떠나고 도착하는 많은 역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그들의 모습을 엿보는 일은 곧 누군가의 인생을 생각하는 일과 같이 여겨졌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은 삶과 세상에 대한 사색이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함께 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나와 열차는 하나가 되어갔다. 더구나 낮의 빛을 버리고 밤의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야간열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역'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의 하나가 되었다. '간이역' '종착역' 같은 단어들은 묘한 향수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역에서 누구를 애타게 보내본 적이 있거나 역에서 가슴 설레며 기다려 본 적도 없지만, 언젠가 역에서 나도 가고 누구도 가야 하는 곳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꼭히 일이 있어서가 아니더라도 울고 싶은 꿈과 마음의 욕망을 지도에만 표현할 수는 없어 기차를 타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언젠가 힘들게 찾아간 남미 볼리비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본 적이 있는 '기차무덤' 같은 곳이 아니라면 기차는 어딘가에서도 발이 묶인 채 서 있을 수는 없다. 아마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흐느끼며 삶의 신호를 보내듯이 기차도 행선지를 위한 등불을 켜고 어딘가로 달려가야 한다. 

당신이 타고 가는 기차는 어디를 달리고 있는가. 꽃피는 봄이 오는 언덕인가, 붉은 낙엽이 가득한 아름다운 가을인가. 백설이 분분히 날리는 꽁꽁 얼어붙은 겨울인가.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인가 아니면 별빛이 찬란히 쏟아지는 밤인가. 우리가 무수히 남긴 목소리는 이 기차역에서 다른 기차역으로 전해지며 간절한 마음을 남기고 또 다른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우리 인생은 간이역을 스쳐 지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역무원도 없고 잠시 정차만 하는 간이역에서 같이 기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은 기차가 서면 내려야 한다. 일찍 기차에서 내려야 하는 사람과 조금 늦게 내리는 사람이 있을 뿐, 그것은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다. 신의 뜻인지, 운명의 부름인지 알 수 없으나 이번 간이역에서 내려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갈 길을 가야 한다. 

간이역 대합실의 사람들은 모두 쓸쓸하고 외롭다.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곽재구의 <사평역에서>)와 같이, 간이역 대합실에서 밤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잔기침을 하면서 인생이란 참으로 고달프고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김수영의 <간이역>)라고 후회한다. 나도 당신도 한때는 누군가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짐한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더 진지하고 뜨겁고 건강하게 살자. 돌아보면 해 놓은 것 없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지나온 간이역이지만 또 다른 역으로 달려가야 한다. 짙은 안개 속에서 잠시 소풍 왔다가 떠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무언가를 위해 더욱 뜨겁게 살다가 종착역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허수경 시인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라는 시집 첫머리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나는 역을 떠났다/다음 역을 향하여".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역에서 만나고 다음 역을 향해 떠나야 한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것 같던 기차를 기다리며 서성이다가 다시 도착한 기차를 타고 마침내 종착역으로 떠나야 한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