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이성복 「그 여름의 끝」

그 여름에도 칸나는 피었다. 폭염과 장마가 유난히 심했던 여름이었지만 정원의 뒤란에서 칸나는 화염처럼 불타올랐다. 칸나의 표정과 몸짓은 언제나 단호하고 비정하다. 뜨거운 햇살에 맞서 도도하게 서 있던 칸나는 가까이 접근해도 좀처럼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헐벗고 영세한 가슴에도 칸나가 피었느냐고 물어 온다. 

여름 내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폭염으로 견딜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기상이변이라 불리는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지난겨울 어렵사리 찾아갔던 남극 지역 파타고니아의 주민들도 빙하에서 얼음이 녹아내리는 속도가 해마다 심각하다고 전했다. 지구가 갈수록 재앙의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은 단순히 기상이변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지구 곳곳에서는 전쟁과 질병, 기아와 자연재해가 어둠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어른들이 일으킨 무모한 전쟁의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 세계를 공포로 휩쓸었지만 벌써 망각의 강 저편으로 가버린 '코로나19', 계속된 가뭄과 기아에 허덕이며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녹아내리는 설원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북극곰들이 당면한 위기와 미래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칸나는 더욱 도발적인 붉은 생명력으로 피어 있었다. 

세상이 과학기술과 자본에 힘입어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정신과 영혼을 도외시하고 물질적·육체적 탐욕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여름에 칸나가 붉은 몸짓으로 이 세상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도덕적 숭고'의 감정이 갈수록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숭고란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자기 긍정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이 사라지면서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기부정과 자포자기의 심정은 갈수록 깊어 간다. 무모한 인간들이 지구 곳곳에서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은 망가지고 인간이 서로를 위해 지녀야 할 사랑과 공생의 마음은 사라져 간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으니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져 가고 있다.

이 여름 칸나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에서 시간과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이 시간은 곧 망각의 늪으로 떨어져 버리겠지만, 시간과 존재에 대한 사유는 내 안 어디엔가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순간들은 단층처럼 혼재되어 내부에 켜켜이 쌓인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영원으로 이어진다. 

살면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조차 모두 특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잠시 피어났다 지는 꽃의 일생일지라도 한순간 한 단어로 요약되는 생은 없다. 불꽃 같은 입술로 칸나는 말한다. 생은 제 삶을 피우는 만큼 붉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꽃들도 이런 아쉬움을 아는지 떠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무하게 산화해 버린다. 또 한 장 인생의 책장은 오늘도 너무 쉽게 넘어가 버린다. 그 여름이 왔을 때 칸나는 피었고, 그 여름이 지나갈 때 칸나는 떨어졌다. 칸나의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시인 이성복은 그의 시 「그 여름의 끝」에서 칸나 대신 백일홍을 등장시키며 그 여름을 노래한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대의 여름은 무사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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