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9. 제주기생
기생 양성소 교방 제주 장춘원
관노비에서 뽑는 악공과 기생
시로 쓴 특별한 제주 기생이름
△교방(敎坊)
기생이 처음 등장한 것은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군영(軍營) 안에 기방(妓房)을 설치해 놓고 군사들 가운데 아내가 없는 자를 위로하였는데 이른바 삼반인(三叛人)이 이것이라고 했다. 당시 기생은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들을 위한 성노예가 된 것이 기생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처음"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음란하고 죄를 지은 과부들을 모아 산 위에서 놀면서 선비들에게 근심을 풀도록 한 것이 기생의 전조(前兆)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기생을 양성하는 학교인 교방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고려 태조 왕건은 삼한을 통일한 후 백제 유민 가운데 수척자(水尺者)가 있었는데 이들이 고집이 세어 통제하기 힘들게 되자 노비로 삼아 각 관청에 노예로 만들었고, 그 가운데 얼굴이 곱고 기예가 뛰어난 여종을 기생으로 삼아 화장을 시켜 춤과 노래를 연습시킨 것이 여악(女樂)의 시초이자 교방의 시작이다.
여기서 수척자란 고려시대에 물고기 잡는 자를 해척(解尺), 혹은 수척(水尺)이라 했고, 산에서 사냥하는 자를 산척(山尺), 나룻터에서 노를 젓는 자를 진척(津尺), 기타 잡역하는 자를 잡척(雜尺)이라고 했는데 '척자(尺者)'란 '짓는다(作)'는 것이며, 짓는다는 것은 곧 놈[者]으로서 모두 천한데 쓰는 명사(名詞)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8대 현종 때 교방을 폐지했다가 11대 문종 때 교방의 연주가 처음으로 팔관회에서 행해졌으며, 18대 의종 때에는 행사를 위해서 배위에 여악(女樂)을 실었으며, 제24대 충렬왕 5년(1279)에는 고을의 기녀를 뽑았는데 교방이 가득찼다. 고려시대의 기생의 등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생의 양성소인 교방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장악원(掌樂院)에서 가무와 춤을 가르쳤다. 장악원은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져 이원(梨園), 연방원, 함방원, 뇌양원, 진향원, 교방사, 아악대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춘원(藏春院)
1653년 발간된 「탐라지(耽羅志)」 에는 "장춘원은 신과원(新果院) 서쪽에 있으며, 여기서 기생이나 악공이 음악을 익히는 곳이다. 악공의 정원은 없으며 관노 중에서 골랐다. (아악은) 교서를 받거나 전문(箋文)을 올릴 때 쓰지만 그 의례가 자세하지 않다"라고 전한다. 또 기생은 관비 중에서 재주와 용모가 뛰어난 자를 올려서 정밀하게 골랐다. 장춘원은 김석익의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장춘원을 숙종 15년(1689) 목사 이우항(李宇恒)이 설치하여 기생과 악공이 음악을 익히는 '교방'으로 삼았고 좌위랑(左衛廊)에 있다.'라고 하는데 「탐라지(耽羅志)」의 장춘원 기록이 나온 뒤 36년 후 숙종 15년(1689) 목사 이우항(李宇恒)이 좌위랑(左衛廊)으로 이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좌위랑은 어디인가? 제주목관아 가운데 좌·우위랑(左右衛廊) 중 하나에 속하는 건물로, 중종 때 제주목사 김석철(1456~?)이 독실(纛室)과 좌우랑무(左右廊撫)를 고치고, 또 관덕정 동쪽에 새로 18칸을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예전에 민가에 살면서 근무하던 호남원병(湖南援兵)들의 숙소인데. 원병제도가 폐지된 후에는 심약(審藥), 기패(旗牌), 유청군(有廳軍) 및 무학(武學), 진무(鎭撫), 지인(持印), 기병과 보병(騎步兵), 궁시인(弓矢人), 공장(工匠), 취라(吹螺), 방포(放砲), 아병(牙兵), 나장(羅將) 등이 모두 근무하는 곳이다. 좌위랑에는 심약방(審藥房)이 있어서 의생(醫生)들도 같이 근무했다. 이로 미루어 제주 목사 이우항은 장춘원을 새롭게 창건했던 것이 아니라, 신과원에 있던 장춘원을 원병제도가 바뀐 후 호남원병의 병영 숙소로 썼던 좌·우위랑 중 좌우랑에 장춘원을 새로 옮겨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1704년 목사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 '관청 기록'조에는 장춘원은 4칸이다. 그러나 '교방'에는 인원이 비어 있지만 장춘원을 말하는 것이다. 또 '노비기록(誌奴婢)'조에 보면, 관노와 관비가 눈에 띈다. "관노는 111명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 악공(樂工) 7명"이 보인다. 따라서 "관비는 83명인데 이 가운데 기생이 66명"이었다. 관노비는 모두 194명이었다. 거기에 악공 7명, 기생 66명의 숫자로 보아 어렴풋이나마 장춘원의 규모를 알 수가 있다.
1653년 「탐라지(耽羅志)」에 나타난 관노비의 수는 제주목에 171구(口), 정의현에 51구, 대정현에 126구를 합치면, 모두 348구가 된다.
또한 19세기 기록인 제주 목사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편찬한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 나오는 제주목 관노비는 72명인데 관노가 43명, 관비가 29명이다. 정의현의 관노비는 41명으로, 관노가 29명, 관비가 12명이다, 대정현의 관노비는 46명으로, 관노가 30명, 관비가 16명이다. 삼읍을 합치면 관노비는 모두 159명인데 관노가 102명, 관비가 57명이다.
이로써 관노비만 보면, 17세기(1653 「탐라지(耽羅志)」)에는 348구(口)였던 것이 18세기(1704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194명, 19세기(1843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는 159명인데 점점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노비가 감소한다는 것은 악공과 기생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신분의 자각으로 사회변동을 감지한 조선왕조는 수령권을 강화하였지만 갈수록 사회는 변화의 바람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기생들 이름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기생의 이름은 알 수 있을까? 물론 천민이어서 누가 누구인지는 개별 이름을 알 수는 없다. 누가 천민의 이름을 기억 하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형상 목사는 자신이 총애했던 기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특이하게도 당시 17명의 기생 이름을 시로 남겼다. 신분사회에서는 숫자 단위가 중요하다. 인(人), 명(名), 원(員), 구(口)가 모두 사람을 세는 단위지만, 인, 명, 원은 양반이나 벼슬아치를 셀 때 쓰고, 일반인과 천민, 여자를 셀 때는 구(口)라는 단위를 붙였으며, 신분이 동요하면서 조선후기가 되면 명(名)이나 인이라는 단위의 빈도수가 많아졌다.
이형상의 '열일곱 명의 기생을 읆다'라는 「십칠기음(十七妓吟」 시에 보면,
양대몽(陽臺夢)은 그윽한 무산의 숲[巫林]을 느꼈던가
읍로화는 계수나무의 달[桂月] 다음으로 예쁘구나
소태진(笑太眞)은 천하에서 가장 희다[天下白]고 할 만하고
정녀(情女)를 술자리[酒邊]에서 거두어도 상관 마시라[不關]
봉래신선[蓬萊仙]들의 경치에서는 참된 향[香眞] 피어나고
뜨락에 가득한 봄빛[滿院春]은 수놓은 듯 점점[繡漸]이 떠있네
맑은 바람 기다리는[待淸風] 사람이 옥보다 나은데[人勝玉]
목란꽃[木蘭英]이 이 매화[此梅]의 수심을 끌어내는구나
이 시 속의 기생의 이름을 정리하면, 양대몽(陽臺夢), 무림(巫林), 읍로화, 계월(桂月), 소태진(笑太眞), 천하백(天下白), 불관(不關), 정녀(情女), 주변(酒邊), 봉래선(蓬萊仙), 향진(香眞), 만원춘(滿院春), 수점(繡漸), 대청풍(待淸風), 인승옥(人勝玉), 목란꽃(木蘭英), 차매(此梅) 등 17명이다.
△기생과 악공의 공연
「탐라순력도」 「정의양로(旌義養老)」는 1702년 11월 초3일 정의현청에서 양로연(養老宴)을 여는 광경이다. 이때 정의현의 노인 가운데 80살 이상이 17인, 90살이 5인이나 되었다. 이들에게는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로 명예 관직인 수직(壽職)을 하사하거나 지팡이, 음식을 내렸다. 이때 축하연의 의미로 기생과 악공들은 거문고, 교방고, 장고, 퉁소, 피리를 연주하고 2명의 남성이 춤을 추어 흥을 돋우었다. 이형상 목사 양로연 이후 매년 봄, 가을에 양로잔치를 열었다. 오늘날 마을마다 세초에 여는 마을 경로잔치의 풍속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방탐승(正房探勝)」에는 이형상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척의 배가 뱃놀이 하는데 한 척은 기생을 태우고 노래하고 있고, 한 척의 배에서는 악공의 연주 아래 두 명의 남성 무용수가 '선유락(船遊樂)'을 공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