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김현승 「가을의 기도」

지루하던 더위와 장마로 아우성치던 여름이 지나갔다. 올해는 가을 소식이 유독 늦게 왔다. 며칠 사이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또 다른 계절을 재촉하는 듯하다. 

가을바람은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고 가을의 잎새도 단순한 잎새가 아니다. 지난 여름에 웬만큼 지친 탓인지 단풍들도 왠지 활기찬 생기를 찾지 못한 모습이다. 나뭇잎에는 초록색을 띠는 엽록소 외에도 여러 개의 색소가 있다고 한다. 올여름에는 초록이 워낙 짙었던 때문인지  숨죽이고 있던 노랗고 붉은 색소가 가을이 되니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나뭇잎처럼 사람의 마음속에도 기쁨과 행복, 슬픔과 불행의 다양한 요소가 있어서 기분과 상황과 시기에 따라 여러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가을의 속삭임이 나를 위로하고 어루만지니 내부에서 나타난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가을의 기운을 마음에 담고 다른 내 삶의 모습을 바라본다. 가을이 전해주는 언어는 마음을 더 경건하고 평온하게 해준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바람은 속삭임처럼 다가와 마음을 간지럽히고, 햇살은 따스하게 다가와 몸을 감싸안는다. 

저녁노을에 물든 주황빛 하늘 사이로 떨어지는 단풍잎 하나가 어깨에 내려앉는다. 단풍이 울긋불긋 산자락을 물들이고 수확을 앞둔 들판에서 풍요로운 가을은 깊어간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하루를 마감하고 가을밤이 깊어지는 것을 알려준다. 싸늘한 달빛과 별 아래에서 가을의 이야기는 더욱 무성해져 간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은 때로는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일깨우는 황홀한 시간이다. 나의 고향은 감나무가 풍성하게 늘어선 작은 마을이었고, 그곳의 가을은 해마다 풍요로운 시간으로 다가왔다. 가을바람이 스치는 감촉과 색깔들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잊고 있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가을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떠나간다. 

수확을 기다리는 황금 들판의 노적가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을 들판은 밀레의 그림 '만종'을 생각나게 한다. 저녁이 되어 하늘이 붉게 물들고 고단한 하루 일을 끝낸 부부가 감자를 수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하고 있다. 농촌의 그윽한 흙냄새를 품은 황혼 녘의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모습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없다. 

은행잎이 겨우 노랗게 물들었는데 시 읽는 계절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각박하게 돌아가고, 사람들도 그 속도에 휩쓸려 허덕이며 살아간다. 삭막한 길 위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감로수는 누군가의 시 한 줄일지 모른다. 가을에는 단풍 같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 누군가를 위한 기도와 사랑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동안 잊었던 사람이 문득 그립고 단풍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혼자서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미워하던 것도 용서하고, 잊어졌던 사람도 그리워하며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은 시간이다. 

시인 김현승은 가을은 "릴케의 시와 자신에/ 입맞추는 시간"이라고 썼다. 가을이면 릴케의 시와 입 맞추게 되는 까닭은 그의 시가 풍겨 내는 치열한 고뇌와 고독 때문이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는 "기도하게 하소서… / 사랑하게 하소서… / 호올로 있게 하소서…"와 같이 '기도'와 '사랑'과 '고독'을 주제로 하고 있다. 또한 '기도'의 심상을 '낙엽'과 결합시킴으로써 가을의 경건함과 애수의 정조를 자아내게 한다.

릴케도 그의 시 「가을」에서 "밤마다 무거운 대지가/모든 별들로부터 고독속으로 떨어진다."고 노래했다. 흔들리지 않는 꽃은 없고 어둠에 갇히지 않는 별은 없다고 한다. 모든 흔들리는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함이고 어두운 것은 반짝이기 위함이다. 삶은 흔들림 속에서 피어나고 어둠 속에서 빛의 시간이 온다. 

이 계절이 전하는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 삶은 더욱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가을은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처럼 찾아왔다 떠난다. 그렇지만 이 짧은 순간, 가을의 아름다움과 의미가 담긴 한 줄의 시를 읽으며 우리의 삶에 대해 사색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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