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급작스레 추워지면서 따끈한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그래도 모처럼의 주말은 집안에 눌러 앉기는 섭섭하다. 여기저기 공연이나 전시 소식, 지인의 출판기념회 소식도 들린다. 하루에 이 모든 걸 다하긴 힘들고 그 중에 찾는 이가 드물 것 같은 곳을 기보기로 한다. 이 또한 주관적인 기준인데 누군가 섭섭해하는 이도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다.
내가 찾은 곳은 장애인 예술작품 전시회였다. 1년 동안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아크릴 페인팅 작품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함께 참여한 코너도 있어 설렘 반 기대반의 마음이었는데,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귀한 작품들이었다. 전문 작가들이 아니어서 순수한 그 마음 그대로 전달받았다고 해야 할까? 그 어떤 전시보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차분해져서 돌아올 수 있었다.
막물 참외를 한입 베어문다
여름볕 눅이는 바람소리 같은
오빠 얼굴 떠올린다
보리타작하고 남은 검불과
소꼴 주려고 베어 온 풀을 섞어서
마당 한 켠에 모깃불을 놓았다
멍석에 둘러 앉아
옥수수를 먹다 발견한
너울너울 춤추는 반딧불
오빠의 한손엔 반딧불이
또 한손엔 호박꽃 한송이
어느 새 호박꽃이 푸르게 빛났다
힘들 때마다 오빠가 따다 준 하얀 등을 떠올린다
(이금순 시 「가을이 문턱에」 전문)
참 따뜻한 시다. 으스스 추워지는 가을의 끝자락에 이렇게 따뜻한 추억 한 자락 떠올릴 수 있는 자는 행복할 것이다. "여름 볕 눅이는 바람 소리 같은 오빠"는 아니더라도 붕어빵 한 조각 몰래 쥐어 주던 그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 릴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순간은 따뜻하지 않을까 싶다.
심심할 것 같지 않은 긴 하루를 연상케 하는 영화를 한 편 보았다. 테렌스 데이비드 담독의 영화 '긴 하루 지나가고'이다. 80여 분의 상영 시간이 긴 하루 같았다. 주인공은 11살 소년 버드, 어딘가 모르게 세상과 융화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유화 그림에 스며들지 못하는 물방울 같다고나 할까.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이 곁에 있지만 버드의 감정은 늘 스산한 바람이 맴돈다. 학교와 교회는 버드에게 낯설고 무섭다. 차렷 자세로 앉거나 서야 하고, 규율에 어긋나면 단체로 매를 맞는다. 유일한 위안은 동네 영화관에 가는 것인데, 그마저 형편을 고려해 엄마를 졸아야 가능하다. 자주 들려오는 엄마의 노랫소리는 구슬프다. 버드에게 세계는 잘 읽히지 않는 소설책인지 모른다. 아니면 시일지도. 상상과 실제가 뒤섞이고, 노래와 문장이 뒤섞이는 영화 장면은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높은 다락방 같다. 다락방에서 창문 너머 세상을 관찰한 버드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무척 궁금하다.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이 삶의 자양분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우는 아이를 불러 저녁밥을 먹이고 손을 잡고 집까지 데려다 준 이웃 어른이 있었다는 누군가의 추억을 들었을 때, 나는 뜻 모를 눈물을 흘린 적 있다. 그런 손길이 그리운 것이다. 동네 어귀, 수국이 놓였던 자리에 해가 저물도록 앉아 있는 노인을 보면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억새처럼 말라버린 노인의 다리가 언제 풀릴지 모르는데, 찾아오는 이 언제일지 까마득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슴에 남아 있는 노랫가락이 있다면 다행이건만 그마저 없다면 하루는 너무 길 것이다. 긴 하루 지나기 전에 따뜻한 온기 전하는 한마디의 말 어떨까? 단, 1분 만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