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닷새 정도의 물질을 하고 나서 해녀들은 바다 청소로 분주하다. 물에 들어도 들고 나올 게 별로 없을 거라는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소라 몇 개 겨우 건져 집에 가서 죽 쑤어 먹었다는 후문도 있다. 지름이 검지 반쪽만 한 소라에 새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차마 떼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며 한숨짓는 이도 있다. 바다가 늙어버렸다는 말이 시적 표현은 아니다. 바다는 더이상 믿어볼 만한 터전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바다가 한 번 뒤집어져야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비가 잦았던 2024년, 귤맛도 싱겁고, 바다도 썩은 내가 진동한다. 

맨살의 얼굴로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
외로울 때마다
바다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나는 바닷가 태생
구름에서 일어나 거슬러 부는
바람에 쥐어 박히며 자랐으니
어디에서고 따라붙는 소금기
비늘 되어 살 속 깊이 박혔다
떨치고 어디론가 떠나 보아도
되돌아 오는 윤회의 파도가
내 피 속에 흘러
원인 모를 병으로 몸이 저릴 때마다
찾아가 몸을 담그는 나의 바다
깊은 허망에 이미 닿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몸이 되었을 때
나는 바다로 가리라
소리쳐 울리라
제주바다는
맨살의 얼굴로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
(김순이 시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 전문)

"바람에 쥐어 박히며 자랐으니 어디에서고 따라붙는 소금기"가 요긴하게 쓰일 때도 있다. 싱겁다는 말이 때로는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것 없고, 세상에 쓸모라는 게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피해라는 게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겠지만 대체로 사람은 부정적인 것에 한해 준 것보다 받은 것에 매여 산다. 그것이 안전에 유리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맨살로 소리쳐 우는' 바다야 시도 때도 볼 수 있지만 바다 속이 뒤집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근래 만난 해녀들은 하나같이 바다가 이제 다 끝났다고 한다. 오랜만에 물에 들어서 빈몸으로 나오는 게 어쩐지 머쓱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나가면 지폐 두어장 쥐는 맛에 시름도 잊었건만 저울 달만한 물건이 없으니 집에서 볶아 먹고 죽이나 써먹을 양으로 바다에 들 판이란다. 그래도 되는 팔자라면 재미로라도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제대로 심각해진다. 

불턱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으러 동쪽바다 동네 할머니들을 만나러 갔더니 19금 이야기만 잔뜩 듣고 왔다. 할머니들 표현에 의하면 19금 이야기라 해봤자 '천지박살 난 물 만난 솜'과 같다. 단어 하나하나가 삼단뛰기 은유이니 참 이해하기 힘들다. 천지박살은 무엇이며 물 만난 솜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온몸이 바스라지고 솜이불처럼 무거워 살 의욕이 없다는 뜻이다. 겁탈에 가까운 부부강간을 당한 어떤 이의 하소연 끝에 나온 은유다. 마침 제주4·3영화제에서 여성의 몸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유린 됐는가를 보여준 영화를 본 터라 우스개로 오가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언젠가 늦깎이로 시를 배우고 쓰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적 있다. 마침 TV에서 대통령이 나와 4·3추념식 연설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서고 있는 것도 모른 할머니는 "사과 헌다고 되여게, 다 죽여비어사주"라며 혼자 분개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하는 것조차 미안한 상황이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헛기침을 했더니 활짝 웃으며 기다렸다고 하는 거다. '방금 본 것은 뭐였지' 하는 의아한 생각도 있었지만 자연스레 TV에 나온 대통령의 사과 이야기로 이어졌다. 할머니의 말인즉슨, 사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다. 용서도 답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와, 이런 과격한 의견도 있구나 싶으면서 그 말이 오히려 솔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머리끝이 과짝 일어사고, 입이 탁탁 털어져. 모수완 게"

머리끝이 소스라치고 다문 입술이 달달 떨리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 물론 익숙히 알고 있는 듯한 의미이지만 구체적 상황을 떠올리려 애써본다. 그것이 타인을 존중하는 방식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지만 유사한 상황을 떠올리며 견주어 보는 것이다. 무섭다고 느꼈던 경험은 꽤 있었다. 어렸을 때 꿈을 꾸면 공산당이 쳐들어오는 꿈을 자주 꿨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오름에서 공산당이 자꾸 쳐들어왔다. 나는 공산당을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게 공산당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지금 생각한 의아하다. 어쩌면 나를 공격하는 모든 사람은 공산당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꿈에서 쳐들어 온 건 그들이었고, 나를 향해 총을 쏘려고 한 것도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공산당이 틀림없다. 누군가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거 서청이었을 걸"하고 웃었다. 

중학교 때 진짜 무서웠던 건 '단체기합' 이란 걸 받을 때다. 단체기합을 받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누가 무단결석을 해도 단체 벌을 받고, 수학 평균 점수가 낮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무서운 벌은 다른 애가 맞는 걸 지켜보는 것이었고, 뒤돌아서서 맞는 소리를 듣는 거였다. 어떤 선생은 책상 위에 올라가라 하고선 발바닥을 때렸다. 왜 그랬지? 그리고 그때는 그게 왜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지? 지금 와서 누굴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라 참 이해가 안된다. 사람을 때린다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폭력에 무디었다는 게 부끄럽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 시를 쓰는 그 할머니가 TV를 보며 분노했다는 건 아직 젊다는 것이다. 감각이, 감수성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은 말을 못하고 이가 탁탁 부딪칠 정도로 떨기만 하던 한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날의 공포가 아직도 몸 속에 살고 있어 말을 할 수 없고, 생각할 때마다 "살려줍써"라는 소리가 입 안에서 탁탁 부딪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보다 더 힘이 센 건 몸이 아닐까 싶다. 말을 숨어서 나오지 못하지만 몸은 동굴 밖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죽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12월이다. 추워서 덜덜 떨기보다는 분노에 차서 덜덜 떠는 그런 날도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