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31. 비양도에 온 일본 잠수기어업
일본 서구를 반면교사로 삼아
비양도 처음 잠수기어업 시작
어업담당자 개화파의 김옥균
△세계에서 처음 0% 무관세 조일수호조약
국력이 미약하면 함포를 앞세운 힘에 굴복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일본은 서구에 대해 속으로는 열불이 났지만, 당시 자국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여 우선 자력을 키우기로 했다. 하여, 몰려드는 서구와 불평등 조약의 이행은 최대한으로 미루고, 반면에 하루빨리 그들의 지식과 과학기술을 배워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서구에 대응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특히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현)과 조슈번(현재 야마구치현)은 에도 바쿠후에 종속되었지만, 그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권이 있어서 독자적으로 서양의 선박과 무기로 현대화하고 인적 자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학생들을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후에 이들 번은 무기력한 에도 바쿠후 타도 운동을 벌였고, 페리 함대의 조약을 모델로 삼아 1876년 조일 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섬나라 일본은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륙 세력에 의한 해양 진출을 지금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선량한 조선이 이들 강대국과 관계를 잘 유지함으로써 일본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이는 조선의 방어 중심적인 비 침략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에도시대의 정치가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1834~74)는 특히 "조선이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면 (일본은)은 계속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1876년 조일수호조약에서 눈에 띄는 내용은 4조와 5조에 들어 있는 일본 통화(通貨) 사용의 허용, 무관세 수출입 등 일본 상인들의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보장하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다른 조항도 문제가 많았지만,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무관세 수출입 조항'이야말로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된 가장 어리석은 협약이었다. 우리나라 통상 대표부의 무지로 인해 세계 최초의 수입관세 0%의 조약을 맺음으로써 관세 한 푼 받지도 못한 채 일본 상품이 세금 없이 조선에 대거 쏟아져 충실한 일본 자본주의 시장이 되었고, 특히 조선의 전통 생산품들은 빠르게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된 3일 뒤 1876년 3월 2일 일본의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마이니치신문 전신)은 조약의 사실을 호외로 보도했다. 일본은 "집집마다 국기(일본기)를 내걸고 그들(구로다 키요 다카:黑田淸隆, 특명전권대사 일행)을 환영하자." 조선과의 조약 체결이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라면서 일본 전역을 들뜨게 했다. 당시 보도로는, '구로다 특명전권대사 일행이 조약을 체결하고 도쿄 시내 신바시 정거장에 도착하자 당시 내각의 최고위직인 태정(太政) 대신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급 관료들이 마중 나왔으며, 육군기병대의 호위 속에 왕궁에 도착하자 주상(主上)이 정원(正院) 계단 위에서 신하들을 거느리고, 구로다 일행을 맞았을 정도였다. 이날 신바시 정거장과 시내 전체가 남녀노소 환영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니 실로 나라의 영광'이라고 보도했다. 반대로 조선은 1876년 11월 12일에 초량왜관이 설치되면서 부산 개항이 사실상 시작되었다(정운현, 2018). 또한 조약 이후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세력 다툼이 한창이었고 이럴수록 일본은 한반도를 넘어 대륙 침략의 흑심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만약 당시 조일수호조약의 정상적인 관세수입이 있었다면 당시 조선의 경상수입의 30~40%를 차지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권해호, 2005). 역사는 반복된다. 조일수호조약(부록조약 및 무역규칙)의 일본 모델은 1842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킨 후 청나라에게 강요하여 체결한 남경조약이나, 또 일본 자신이 1854년 미국으로부터 강요당한 미일화친조약으로 이들 조약이 조선에 강요한 불평등조약이 재연된 것이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관세 조항 없이 체결된 유례없는 사기 침략 조약이 강요당한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이에 당황한 것은 청나라였다. 1880년대가 되면 조선은 일본의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서 서구 국가들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였는데 청나라의 중재로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 같은 해에 청나라와도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었고, 이어서 1883년에는 영국과 독일, 1884년에 이탈리아 및 러시아, 1886년에 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조기준, 1994).
△일본 어민의 비양도 상륙
합법적으로 평등할 때 어떤 방면으로 나아가는 것을 진출이라고 부른다. 만약 어떤 조약이 강압적으로 불평등하게 이루어졌다면 어떤 행위에 대해서 침탈(侵奪)이라고 말해야 한다. 침탈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침범하여 빼앗아 가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조약이라는 이름의 합법을 가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일수호조약 이후 조선의 바다가 그랬다. 아주 적은 어업세만을 내고 조선 해역을 제집처럼 마음대로 체류하면서 조선의 황금어장 해산물은 물론 각지 섬에 어물 창고를 만들어 말린 후 가져가는 행위라면 침탈이 맞다. 진출은 일본 학자들이 쓰는 용어다. 당연히 일본인의 처지에서는 침탈이라고 부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 어민들은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크리스트교 엄금방침에 따라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펴는 바람에 조선으로의 고기잡이가 금지되었다. 해금으로 당연히 일본 어민들이 타격이 컸지만 그래도 불법적으로 조선, 제주도까지와 밀어(密漁) 행위를 저지르는 서일본(西日本) 어민들은 메이지 초기까지 이루어지 있었다. 가뭄의 단비같이 일본 어민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준 것은 바로 1876년 조일수호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이제 일본 어민들은 날개를 단 듯 조선 바다로 낚시어업이나 연승어업, 어망어로와 새로 일본에 도입된 잠수기어업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에 잠수기어업이 도입된 것은 메이지 초년에 증전만길(增田萬吉)이라는 사람이 영국인으로부터 배운 기술을 시작으로 이후에 하코다테와 나가사키 등을 중심으로 잠수기어업이 확산하였다. 1870년대에 일본 잠수기어업자들은 소안도, 추자도, 거문도 등 전라도와 경상도 해역에서 활동하다가 제주도가 잠수기어업의 최적지로 알려지면서 비양도, 가파도, 우도로 몰려들었다.
제주도에 일본인 잠수기어업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79년 나가사키의 길촌여삼랑(吉村 與三郞)으로 거제도에서 잠수기 1대로 전복을 캐다가 제주도 비양도까지 왔고, 비양도에 창고 1동을 짓고, 감자를 재배하며 생활하기도 했다.
살면서 선례를 남긴다는 것은 하나의 길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후 조선은 무관세의 불합리한 조항을 깨닫고 일본에 새로운 통상조약을 요구하게 되었다. 1882년 5월 전문 41조의 통상장정 초안 교섭이 시작되었지만 같은 해 임오군란이 발생하면서 일본공사관이 습격당하고 친일 세력이 무너져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 관계를 주장하며 새로운 조약으로 대체하기 위해 청나라의 간섭이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청나라의 상민수륙무역장정 같은 호혜 조건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을 체결하였다. 이 장정 41조에는 함경·강원·경상·전라 4도에서 일본 어민들의 어업활동을 허락하고, 어획한 수산물을 판매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범죄 조류에 의하면, 일본 어민은 치외법권을 부여하여 같은 일행이어도 범죄자만 공사관으로 호송되고, 동행자는 어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에 이로운 어업세는 어업상태를 봐가며 2년 후 정하기로 했지만 때가 되자 조선은 어업세 논의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측은 제주도 어장에서의 잠수기 어업분쟁의 근거를 들어 계속해서 연기하였다. 이 속셈에는 제주도 어장을 빌미로 조선 정부를 괴롭혀 새로운 이권을 얻으려는 술책이 숨어 있었다. 제주도 어장은 제주도민들의 바다 밭이었다. 제주도가 전라도에 속한 까닭에 일본 잠수기업자 나잠 해사(海士)에 의해서 전복을 남획하는 바람에 제주도민들과 분쟁이 많았다. 급기야 제주도민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일본 잠수기어업을 금지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김수희, 2010). 이 시기 조정의 어업 담당자는 개화파의 영수 판포정사 김옥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