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구좌읍 동복리의 소녀들은 배움의 권리마저 빼앗긴 어둠의 시대에 밤마다 모여 한글을 익히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켰다. '동복리 야학 소녀회'로 불린 이들의 활동은 단지 문맹 퇴치 차원을 넘어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선 항일 의식의 실천이었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등잔불을 밝히며 글을 배웠던 그 순간들은 제주 여성들이 민족운동의 주체로 우뚝 섰음을 보여준다.

동복리 야학 소녀회는 배움에 대한 열정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의 모범이기도 했다. 낮에는 곡식을 심고 밤에는 글을 배우며 어렵게 모은 기금을 마을 축항 공사에 희사해 기념비까지 남긴 사실은 당시 소녀들의 공동체 연대 정신을 증명한다. 또한 배움에 그치지 않고 지혜로운 어머니와 마을의 '지낭'으로 성장해 일상의 삶에서도 항일의 유산을 이어갔다. 이는 제주 해녀 항일운동과 더불어 여성들의 실질적 역할과 기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는지 말해준다.

광복 80년을 맞는 오늘, 동복리 소녀회와 같은 여성들의 항일 역사는 여전히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1920년을 전후해 제주에서만 20여곳 이상의 야학이 밤을 밝혔지만 이같은 자랑스러운 역사를 널리 알리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항일운동은 청년이나 지식인만의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여성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주여성의 항일 역사를 복원하고 기념해 민주주의의 뿌리를 확인하고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