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중 비상임논설위원·전 중등교장
늦가을의 끝자락, 반백 년을 함께한 초등시절 친구들과 추억의 여행을 떠났다.
거제도의 해금강, 외도, 노자산, 포로수용소 등을 탐방하는 간결한 일정이었지만 여정 곳곳에서 묻어난 관계의 온기는 필자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첫 일정은 해금강 유람선이었다.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자 푸른 물결과 기암괴석이 엮어낸 장관이 펼쳐졌다. 사진에 담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팔짱을 끼며 균형을 맞춰주는 모습은 숱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정이었다.
외도에서는 개척자의 40여 년 투혼이 깃든 보타니아의 열대식물과 남국의 풍광이 어우러진 길을 걸었다. 떨어졌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모여 하나가 되는 모습, 햇살이 식물 사이로 스며들 때마다 새어나 온 감탄들은 오래된 친구들만이 가진 편안함을 말해줬다. 저녁에 파이팅하며 건배할 때, 반백 년 전 추억과 지금 순간이 포개지며 뭉클한 감동을 줬다.
노자산 케이블카 안에서는 단풍 빛 능선과 한려수도의 풍경이 차례로 눈앞에 펼쳐졌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흩어진 섬들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고 서늘한 바람 속에서도 풍경은 조용한 위로처럼 마음을 덮었다. 다도해의 장관을 바라보던 친구들의 표정에는 지나온 세월에 대한 묵직한 신뢰가 배어 있었다.
마지막 일정은 포로수용소였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은 공간에서 모두의 걸음이 느려졌다. 철조망과 조형물, 기록물 앞에서 자연스레 말수가 줄었다. 삶의 매 순간 크고 작은 상처를 겪어온 이들에게 역사의 무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숙연함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상징탑 앞에서 묵례한 뒤 다시 손 하트를 그리며 웃는 모습 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힘이 무엇인지 새삼 확인하게 됐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추억의 복원이 아니었다. 우정은 시간을 이긴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자리였고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관계의 온기를 떠올린 순간들이었다. 머리엔 어느새 희끗한 서리가 내려앉고 눈가에도 주름이 늘었지만 세월 속에 쌓인 배려와 이해는 더 깊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웃사촌의 거리, 공동체의 연결, 사람 사이의 신뢰는 점점 옅어지고 있다. 편리함과 속도에 익숙해진 삶 속에서 인간적인 따스함이 사라지는 현실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친구들이 보여준 모습은 이 시대에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히 일러줬다.
제주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개발과 인구 이동이 반복되면서 공동체의 끈은 얇아지고 오일장과 골목길에서 마주치던 정겨운 시선은 흔치 않다.
그러나 바다와 섬길 위에서 역사 앞에서 나눴던 웃음과 눈빛은 지역사회에 조용한 질문을 건넨다.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역사회는 관계의 힘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요즘처럼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사람과 사람의 연결은 더 귀해진다. 공동체의 힘은 제도보다 마음에서 시작되고 그 마음은 작은 관심과 꾸준한 소통 속에서 자란다.
해금강과 외도의 절경, 노자산의 단풍, 포로수용소의 상흔을 함께 바라보던 친구들처럼 우리 제주 사회도 다시 '신뢰와 정이 흐르는 관계'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시대를 관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귀한 자산이며, 이번 여행에서 오랜 우정이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