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를 찾는 사람들] <1부> 출륙 ③두모악의 생성과 소멸
| 두모악이라 불린 제주인들은 사료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자주 등장하는 편은 아니다. (두모악은 두독야지·두무악 등으로 불리지만 여기서는 두모악으로 통일한다.) 두모악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성종·중종·선조 때 두모악으로 대표되는 제주인들을 만나게 된다. 사료에 나타난 그들은 조선정부에 매우 필요한 존재였고, 차츰 그들만의 위치를 확인시켜갔다. 그러나 영원히 두모악으로 남지는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어느덧 뭍사람이 돼 있었다. |
4. <1부> 출륙 ③ 두모악의 생성과 소멸 
▲ 경남통영앞바다<김대생 기자>
# 물질로 정착
두모악의 출현을 알리는 최초의 기록은 「성종실록」에 나온다. 그 때가 1477년(성종 8년)이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두모악은 여전히 의심스런 존재였다.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그들은 남해안 이 곳 저 곳을 헤집었다. 성종 8년 기록에는 ‘우리나라 사람을 약탈하는 자가 이 무리들인지 의심스럽다(掠我國人者疑是此徒)’면서 경계의 눈초리를 두고 있다.
어쩌면 이런 기록 때문에 일본인들이 교과서를 왜곡할 때 ‘제주인은 왜구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주인은 당연히 왜구는 아니다. 왜구를 막기 위해 두모악의 기술을 빌려야 한다는 의견들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나오기 때문이다.
성종 23년(1492년)엔 두모악을 활용하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을 맡던 변처녕이 “이들 무리는 배를 잘 다룬다. 만약 그들을 활용한다면 왜적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정말 유익할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배를 잘 다룬 그들은 중종 때가 되면 세력이 더 커진다. 뭍으로 진출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음에도, 그들로 인한 불안요소를 그다지 찾아보지 못한다는 점도 이채롭다. 다만 그들이 생업을 잘 하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 이어진다. 조선 중앙정부는 바다를 잘 다루는 그들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두모악은 ‘잠수하는 사람’이었다. 그 기록은 중종 11년(1510년)에 등장한다. ‘頭無岳卽수(물水변에 囚)人’이라고 돼 있다. 수인은 ‘잠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물질을 해서 수산물을 획득하는 무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기록을 잘 보면 한 지역을 터전으로 두모악이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당시 김해 지역에 도요저(都要渚)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곳에 사는 두모악이 무려 1000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들에게 밭은 없으며, 오로지 해산물을 수확해 삶을 꾸려간다고 했다. 한 마을에 두모악이라 불린 제주인이 1000명이나 무리를 짓고 살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두모악은 수인으로서, 그들의 역할을 해야 하는 위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두모악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지 40년만에 커다란 세력을 형성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사라지는 두모악 
▲ 선조 조선왕조실록
그러나 두모악은 언제부턴가 사라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점차 왜구의 침탈이 뜸해지는 것과도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제주도를 떠나는 두모악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사라졌다는 의미는 두모악의 필요성이 감소됐기에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고 보면 더 적절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두모악은 선조 30년(1597년)의 기록이다. 임진왜란 막바지로 정유재란이 일어난 때다. 권율의 말 속에 “두모악(豆毛岳)과 김아동 등을 부산포에 머물고 있던 왜장에게 파견해 밀약을 했다”고 언급돼 있다. 아마 당시 제주인들은 뛰어난 배 건조술을 활용해 임진왜란 때도 활약하지 않았나 보여진다.
두모악의 기록은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임진왜란이후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바다를 주생활권으로 하던 왜구와 그 왜구에 맞서 배를 만들던 기술을 뽐냈던 두모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 두모악은 특정한 역(役)
한영국(전 인하대 교수)은 조선후기에 나타난 호적대장을 참고로 두모악의 실태를 연구한 인물이다. 그는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1609∼1891년)을 대상으로 연구했다.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이 현존하는 호적대장 가운데 두모악의 호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적대장에 등장하는 두모악은 역(役)으로 표기돼 있다. 역(役)으로서 두모악은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그들의 직업을 뜻한다. 그런데 1708년도분 이후에는 두모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호적대장에 두모악이 등재됐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임진왜란이후 호적에 당당히 오르고, 그들은 바다에서 생산해내는 물건을 나라에 바치는 일을 역(役)으로 대신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한영국은 두모악은 대체로 천민으로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영국은 “유기장(柳器匠) 피장(皮匠) 등 천대받던 인구들은 일반 농민과는 격리된 가운데 그들 나름의 마을을 형성하고, 그들 사이에 혼인관계를 맺으며 생활했다. 두모악도 육지인이 꺼리는 존재였고,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특정한 역(役)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주거와 출입이 통제됐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강조한다.
두모악이 문제를 발생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삶이 어려웠을 뿐이다. 그래서 제주도를 떴다. 그러나 제주도를 뜨는 것도 쉽지 않게 된다. 제주인들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출륙금지령’이 떨어진다. 제주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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