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제주향청과 하도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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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의 구마슬(具馬瑟) 천주교 신부가 1909년에 세운 신식여학교인 제주사립신성여학교(4년제 초등과정)는 제주도 최초의 제주여성을 위한 현대교육시설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6년 식민정부에 의해 문은 닫고 말았다. 하지만 문을 닫기까지 신여성을 다수 배출해 이들이 서울과 일본 등지로 유학, 제주사회의 지식인 여성집단을 구축해 제주의 근현대화 과정에서 숱한 업적을 남겼다.
최정숙 제주여성 1호 교장이자 교육감(1902∼1977)은 바로 이 학교 1회 졸업생(1915년 3월25일)이다. 그는 해방이후 학교를 복원·재설립해 지금의 신성여학원인 신성여중·고와 신성유치원을 비롯 까리따스 유치원이 계승되고 있다. 최정숙 교육감과 함께 당시 1회 졸업생은 고수선·강평국 등 5명이다. 따라서 현대제주여성교육의 산실인 제주향청에 대한 조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제주해녀항일투쟁의 산실, 하도초등학교
일제강점기에 제주의 각 마을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소가 대개 3∼4곳이 있었던 것을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근현대 제주여성의 교육수여 장소였던 야학소에 대한 조사나 연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야학소가 제주도에 번창했던 동기 등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다. 다만 청년들이 유학을 통해서 민족의식과 시대사조 또한 세계의 변화를 접하게 되었고, 고향에 돌아와 민족의식고취 차원에서 야학을 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초기 여성운동가 김시숙(金時淑. 1880∼1933)은 여성의 몸으로 1925년 조천리에 여성야학소를 개설했다. 그녀는 여성문맹자들에게 항일 내용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당했다.
1921년도에 설립된 사립 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는 노동야학교육을 통해 항일의식을 키웠던 곳이다. 야학활동은 당시 혁우동맹, 민중운동자협의회 회원 오문규, 김순종, 부승림 등 일부 하도보통학교 선생들이 담당했다. 제주해녀항일투항쟁이 하도리, 종달, 세화, 우도, 성산읍으로 확산되면서 2년여 넘게(1931∼32년)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 신진 청년교사들의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도움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도리의 해녀들은 이곳에서 「노동독본」「농민독본」등을 활용, 문맹자를 위한 기초교육, 신지식교육 등과 함께 은밀히 민족자주의식을 길렀다. 하도리 출신의 고차동(1915년∼) 등 제주해녀항일투쟁에 참가했던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평소 선생님으로부터 민족의식 교육을 공부한 우리 하도리 해녀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일본 어업조합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언니들(부춘화·김옥련·부덕량·김계석 등 당시 해녀항쟁 주도자)과 함께 일본당국에 투쟁할 계획을 짜는 등 항일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당시 해녀들은 야학공부를 통해서 근대교육을 받는 한편 민족의식을 키웠던 것이다. 제주해녀항일투쟁의 효시가 된 하도리는 현재 항쟁의 전황을 살펴볼 수 있는 현장이 없다. 하도리 야학의 산실인 하도초등학교는 옛날 모습이 온데 간데 없고, 야학당시 활동연대나 간략한 내용마저도 학교연혁에서 빠져 있다. 하도리 출신 해녀들에 대한 발자취와 하도리 역사가 단지 몇 줄의 역사, 몇 장의 사진으로만 기록되어서야 되겠는가 깊이 고민해볼 대목이다.
■참고문헌
·「여성문화유산의 현황과 지역문화자원으로의 활용화 방안」(한국여성개발원·제주편 한 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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