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출륙 ⑨출륙 제주도민의 투쟁사 >10<
타 지역에서의 제주인과 토착민과의 갈등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토착민들의 입장에서 이해해보자면 이방인, 즉 근본을 알 바 없는 섬 사람들의 느닷없는 출현은 조바심을 내며 경계해야 마땅했다. 곱지 않은 시선, 지역 토착민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인의 출륙은 삶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헤쳐나가야만 하는 과제였던 것이다. 제주인들은 그 어떤 곳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였다. 더욱이 제주인만의 단결력과 강한 응집력은 극한의 어려움도 극복케 한 원동력이었다. 지금의 후손들이 되돌아보고, 귀감을 얻어야 할 대목이다.
# 바다를 둘러싼 갈등
다시금 제주인의 대규모 출륙이 이뤄진 일제강점기, 제주인과 타 지역민과의 갈등은 보다 구체화된다. 오로지 바다에 의지해 살던 제주에 있어 1890년부터 이뤄진 일본의 어업침탈은 제주도민들의 생계를 가로막는 것과 다름없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해녀들의 출가노동이 늘기 시작했다. 1910년 2500여명이던 것이 1930년대에는 4000여명까지 달하는 등 해녀들의 출가어업이 늘면서 결국 지역 토착민들과의 분쟁으로 비화된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해녀들의 입어를 둘러싸고 1912년 울산 등지에서 소요사건이 일었으며, 객주들의 횡포로 인한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채취한 해조류를 팔기 위해서는 객주를 통해야만 했는데, 토착세력인 객주들은 채취량과 가격을 조정해 중간에서 큰 이득을 취했다. 출어를 위한 준비자금 역시 높은 이자율을 적용함으로써 빌리고 갚는 악순환이 계속돼 해녀들의 고된 노동은 곧 객주의 배를 불리는데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물질밖에 할 줄 몰랐던 해녀들에게는 ‘울며 겨자먹기’였던 셈이다.
결국 1920년 4월 해녀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조직되면서 새로운 길이 모색된다. 해녀어업조합은 주 활동지였던 부산에 출장소, 목포·여수에 임시출장소를 설치·운영하면서 해녀들이 채취한 물건의 판매와 중개, 자금융통 등의 업무를 도맡으면서 해녀들의 권익보호에 적극 나섰다.
물론 분쟁이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간 해녀들의 채취물을 취급했던 해조회사와 해녀어업조합과 밀고 당기는 협상이 이어지면서 지분인수로 마무리됐다. 또 해녀들의 숫자가 더욱 증가하면서 지역어업인들이 크게 반발, 폭행사건으로 비화되는 등 곳곳에서 분쟁은 이어진다. 결국 1925년 해녀의 입어에 관한 협정 체결로 일단락 되지만 해녀들의 입어와 판매를 둘러싼 지역민과의 갈등과 분쟁은 해방이후까지 계속돼왔다.
# 자주항로를 개척하라
1920년대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로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심각한 빈곤에 허덕이던 제주인들은 1923년 제주와 오사카 사이에 직항로가 개설되자 이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썰물처럼 일본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낯선 이국 땅, 값싼 노동자로 팔려나온 제주인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발, 1924년 일본으로 건너왔던 제주의 최초 아나키스트 고순흠 등을 주축으로 노동운동이 벌어지면서 특유의 공동체성을 지닌 제주인들은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 제주의 부녀자·미성년자들을 위한 여공보호회, 신간회 등이 조직되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노동운동은 제주인들의 권익보호는 물론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제주인들의 강한 독립성은 제주-오사카간 뱃길을 확보하기 위한 ‘자주운항운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1920년 후반 1일 1000여명, 매해 3만∼5만명의 제주인의 왕래로 제주-오사카 직항이 성황을 이루자 일본인 선박업자들은 12원50전으로 일제히 배삯 인상에 나선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1928년 5월 오사카에서 제주도민대회를 열어 배삯 인하, 승객대우 개선을 요구하는 등 투쟁을 벌이지만 아무런 결과물도 낼 수 없었다.
이에 착안하게 된 것이 바로 제주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자주항로다.
1928년부터 추진된 자주운항운동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30년 동아통항조합의 출범, 같은해 11월 비록 임대선이었지만 교룡환(蛟龍丸)의 첫 출항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일본선박에 비해 3할 정도가 저렴한 6원50전에 운항되면서 교룡환은 성황을 이뤘으며, ‘우리도항은 우리의 배로’라는 슬로건처럼 제주인에 의한 자주항로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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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인들의 동아통합조합 설립을 1면 톱기사인 사설로 다룬 동아일보 1930년 11월 4일자 | ||
동아일보는 1930년 11월4일자에서 제주인들의 동아통항조합 설립을 1면 톱기사인 사설로 다룬다. 고생 속에서 자신들의 항로를 개척해낸 제주인들의 단결성과 응집력, 경제력의 향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3일 후인 1930년 11월7일자(오사카발)에서는 ‘우리의 배 교룡한의 출항하는 광경’을 제목으로 제주인의 교룡환 운항사진과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조합은 1931년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교룡환의 임대기간이 끝나기도 했거니와 일본선박들이 교룡환을 의식, 12원대이던 배삯을 바로 3원으로 인하하는 출혈경쟁에 나서면서 적자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기만 했던 항공료, 그에 대응하기 위해 출범시킨 현재의 지역항공 제주항공과 많이 닮은 모습이다.
조합은 1931년 4월 이번에는 배를 매입해 운영키로 하고, 같은 해 12월1일 복목환(伏木丸)을 매입해 다시 재운항에 나섰다. 1934년 투쟁적 성격이 강한 동아통항조합이 일제탄압으로 자취를 감추기까지 복목환은 경험을 밑바탕으로 성공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제주인의 자주운항운동은 당시에도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는 등 시사하는 바가 컸다. 현재에 이르러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 지연주의가 결국 제주인의 강한 독립성과 자주성, 단결성을 띤 하나의 공동체 정신으로 승화되면서 어느 지역도 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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